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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새벽부터 심상치 않던 바람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잦아들 줄 모른다. 잠깐 점심 먹으러 나가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오늘, 하루만 집 밖으로 안 나가면 어떻겠냐는 둘째님 말에 ‘그럼 우리 각자 놀아볼까?’를 시전한다. (보름을 붙어 다녔으니 하루쯤 따로 놀 때가 되었다. 난방과 와파가 빵빵한 집에 세 시간 정도 혼자 두는 건 아동 학대 아니고 아동 복지임..) 처음엔 재니가 절대 가지 않을 곳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딱히 그런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어제 서쪽으론 다녀왔으니 오늘은 동쪽을 찍어볼까, 진짜 안 가본 데 어디 없나, 구글 맵을 이리 저리 돌려보다가 ‘환해장성’이란 말에 꽂힌다. 제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바로 맵을 찍고 달려본다. 워셔액을 뿌려도 내 차에 한 방울도 남지 않는..

내내 제주에 있다가 잠깐 대전에 온 날 밤, 큰아이를 데리러 둔산에 나갔다. 목요일 밤 열 시의 둔산동 학원가, 픽업 차량들로 뒤범벅이 된 틈에 겨우 자리를 잡고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둘째 또래의 꼬맹이들부터 큰놈 또래의 고등학생들까지 와글와글 오가는 불빛과 열기가, 마치 떠나온지 오래된 과거의 필름을 꺼내보는 것 같았다. 이 곳은 내가 발 담근 세계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없다,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왜 눈물이 났을까. 카이스트 캠프를 보낸 아이들도, 일본 국제교류를 간 아이들도, 건너건너 소식이 자꾸 들어온다. 그래도 아직은 학년부장이라고 그들의 소식에 나를 끼워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카메라를 보면 브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아이들, 그래 바로 내새끼들이지, ..

종업식이 끝난 주말, 짐을 정리하러 학교에 갔다. 근무한 지는 오래됐지만 수학과는 매년 자리를 옮겨다니기 때문에 그래봐야 1년치 짐이고, 매년 필요 없는 건 다 버렸다고 생각해서 박스 하나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체 뭐한다고 짐이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책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전공서는 버리지 못했고, 연구에 필요한 책들과 논문 자료도 한 짐이라 버리지 못했다. 아이들과 나눈 종례신문이나 편지만 해도 한 상자다. 무소유는 글렀고 풀소유만 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풀소유로 학교를 떠난다. 아파트 마당에서 무빙세일이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종업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아이가 이런걸 주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이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이 글은 동신과학고 근무를 마치며 남겨두는 기록이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이다.2023년은 꽤 괜찮은 해였다. 8기들과 3학년 수업을 하며,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고 가르쳐주는 만큼 흡수하는 아이들을 보며 보람도 있었다. 고3이 되니 어린아이 티도 제법 벗고, 이렇게 어른이 되는구나, 그 시간을 함께했구나, 그런 뿌듯함도 있었다. 2023년의 끝에, 이 정도 아이들이라면 학년부장을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8기들을 3년 동안 가르쳤지만 업무를 맡느라 학년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 중 나를 ‘우리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이가 없었고, 그게 한편으로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 학교에서 나를 ‘우리쌤‘이라 불러주는 아이들이 있으면 좋겠다, 1학년부터 잘 키워서 정말 멋지게 졸업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