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심상치 않던 바람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잦아들 줄 모른다. 잠깐 점심 먹으러 나가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오늘, 하루만 집 밖으로 안 나가면 어떻겠냐는 둘째님 말에 ‘그럼 우리 각자 놀아볼까?’를 시전한다. (보름을 붙어 다녔으니 하루쯤 따로 놀 때가 되었다. 난방과 와파가 빵빵한 집에 세 시간 정도 혼자 두는 건 아동 학대 아니고 아동 복지임..)

처음엔 재니가 절대 가지 않을 곳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딱히 그런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어제 서쪽으론 다녀왔으니 오늘은 동쪽을 찍어볼까, 진짜 안 가본 데 어디 없나, 구글 맵을 이리 저리 돌려보다가 ‘환해장성’이란 말에 꽂힌다. 제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바로 맵을 찍고 달려본다. 워셔액을 뿌려도 내 차에 한 방울도 남지 않는 수준의 강풍을 뚫고 온평포구에 도착했는데, 장성이란 말이 무색하게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환해장성이 대체 뭐야?


… 그렇다고 한다. 지금 남은 흔적들은 제주 해안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고. (삼별초를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는 게 좀 어이없었..) 다시 보니 주차한 곳 바로 옆 벽들도 모두 성곽의 흔적이었다.

여기까지만 하고 조용히 돌아왔어야했는데 바람에 따귀를 맞아가며 구경하다가 이 아이를 보고 말았다.


이곳은 올레길 3번 코스였다. 제주를 그렇게 왔어도 간세를 보고 꽂힌 적 없었는데 스탬프 포인트를 지날때마다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에 서귀포 올레방문자 센터까지 가서 굳이 여권을 사온 게 바로 그제 일, 그러니 오랜만에 혼자 외출을 한 오늘은 올레 여권의 첫 도장을 찍기 딱 적당한 날인 것이다. 이럴려고 재니와 헤어졌나봄. 오늘 외출의 목표를 첫 스탬프 찍기로 정한다! (이정도 의식의 흐름에 따른 전개는 대문자 P에게 일상이지.)

올레 여행자 센터. 여기도 예전에 지냈던 서귀포 시내 숙소 근처였다. ㅎㅎ 오며가며 보던 곳인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여기였네 하는 일은 이제 너무 자주라 새롭지도 않다. 난 매번 이런 식.


물론 올레길의 취지는 도보여행이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여권을 산 건 아니라서, 그냥 내가 여기 다녀갔다는 기록을 구글맵이 아닌 아날로그 여권에 남겨보고 싶었을 뿐이다. 신산포구에서 온평포구까지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저 멀리 보이는 성산 일출봉을 보고 올레길 2번까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로 쓰다보니 나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사는구나..) 그래서 들른 곳은 광치기해변 스타벅스 (응?)

생각해보니 이번 제주여행에서는 스벅을 한 거의 안 갔더라고. 재니랑 있으니 그런 것도 있고, 테라로사와 유동커피에서 데려온 원두로 아침마다 핸드드립으로 카페인을 넣어댔더니 딱히 아쉽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광치기해변이니까(가 무슨 상관이람), 첫 스탬프를 위한 계획이란 것도 좀 세우고 싶고, 이런 저런 이유로 스벅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한정판 메뉴를 안 시킬 수도 없었지. 다만 아쉬웠던 건 분명히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솔로 주문이 들어가서 커피가 한 모금에 끝나버린 거?

그리고 인간이라면 세 입 이상 삼킬 수 없을 것 같던 제주도의 후한 설탕인심도. (당근 케이크는 원래 당근만 캐고 버리는 건가-_-)


계획을 세워보자. 광치기해변부터 온평포구까지 이어지는 올레길 3번 코스엔 총 세 군데의 스탬프 지점이 있었다. 시작점인 광치기해변, 중간지점인 대수산봉 정상, 종점인 온평포구라고 한다. 그럼 셋 중에 가장 가기 어려운 곳이 당연히 대수산봉 정상이겠지? 오케이, 나의 첫 도장을 쉽게 찍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된 거, 대수산봉이란 곳을 올라가보기로 2초만에 마음을 먹는다. 소중한 나의 오름백과를 꺼내 대수산봉을 찾아보니 안내가 있었다.


A지점에 주차를 하면 B까지 5~6분, C까지 5~6분,, 대충 15분 안쪽이면 정상가서 도장찍을 수 있겠군, 별 거 아니네! 라고 생각하고 바로 시동을 건다. 광치기해변에서 대수산봉 주차장까지는 차로 6분 거리.

꽤 친절한 지도였지만 대충 사진찍고 제대로 안 봄. 어차피 나는 오름백과를 정독하고 온 몸이니까.
어.. 5~6분이라고 했지 그게 빡센 계단뿐이라고는 안 하셨잖아요.
사진이 이 경사를 다 담지 못한다. 진짜 오랜만에 숨차게 걸어야하는 급경사였음.
꾸웨엑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보이던 대수산봉, 날씨만 좋았으면 등뒤에 한라산도 보였을거야, 진짜 뷰 미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왜 간세가 안 보이는 거죠? 그러고보니 올라오는 길 어디에서도 올레길을 뜻하는 파랑&주황 리본을 보지 못했다. 어…? 잊고 있던 구글맵을 켜서 위치를 보는데 뎀. 여기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 여긴 어디죠?

그냥 전망대였음..


중간에 갈림길을 하나 지나왔는데 대체 저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길래 오르막이래? 생각만 했는데 거기가 정상가는 길이었다. 흠냥 지나온 길을 돌아 다시 정상으로. 갑자기 눈발까지 날리고 길 양옆은 모두 공동묘지였다. 조상님도 함께하는 올레길투어..

저기다. 정상
올레길 리본이 이렇게 반가울 일이야?
보고싶었다 간세야
나의 소중한 첫 도장

그래서 드디어 만난 스탬프 포인트의 뚜껑을 열고! 두근두근하며 나의 첫 도장을 꽝 찍었다. 꺅 나의 올레여권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좋은 하루였어요! 라고 마무리를 했으면 참 좋았을텐데. 도장을 찍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내가 아는 올레길 도장은 이렇게 작지 않은데, 분명히 코스마다 각각의 심볼이 있는 꽤 큰 도장이었는데 얘 왜이렇게 작음?

허허허허허. 올레길 코스에 시작점, 중간점, 종점의 도장이 각각 다 다른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나쳐 온 광치기해변에서 2번 코스 시작 도장을 찍고 왔어야 했고, 여긴 미니미니한 사이즈의 중간 도장만 가능한 지점이었다. 심지어 ‘2’자도 제대로 안 찍힘 ㅠㅠ 다시 찍으려다가 그러면 진짜 망할 거 같아서 바람에 잉크나 말리고 덮는다.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잔소리 할 재니도 없는데. 다시 광치기해변으로 돌아감. 도장 한 번 찍어보겠다고. (이정도면 정성만큼은 도보 여행에 뒤지지 않는다 -_-) 그 와중에 주차장 진입로 놓쳐서 유턴 후 직진 후 유턴 후 직진해서 들어가느라 이 스벅 앞 길 네 번 지나온 건 진짜 무덤까지 비밀로 하자.

찾았다 올레깃발 (스탬프포인트는 주차장에서도 꽤 멀다.)
23m/s의 흔한 제주도 바람 속,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광치기해변
으억 여기였어.
드디어 찍을 수 있는 건가?!!!!
야무지게 망함.

스탬프함의 뚜껑을 열었는데 도장이 두 개나 들어있었다. 아, 올레길을 거꾸로 도는 사람도 있다더니 시점과 종점 도장이 같이 있나보네? 개이득.. 여기서 다 찍어야지! 하고 신나게 빠박! 찍었는데. 뎀. 여긴 ‘1번 코스 종점’이며 ‘2번 코스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종점 도장은 1번 페이지에 찍었어야했…..

1번 페이지에 다시 찍음. 여기가 제 도장자리.. ㅠㅠ

다시 1번 페이지를 펼쳐 1번 종점 도장을 다시 찍고나니 드는 생각. 그럼 2번 코스 종점 도장은 온평포구에 가야하는 거네? 나 아까 온평포구 다녀왔는데 왜 안 찍었지. 그럼 뭐 할 수 없네. 다시 온평포구로.. (좋은 하루다 정말)

가볍게 돌아온 온평포구. 여기가 2번 코스 종점이며 3번 코스 시점.
이렇게 반가울 일이냐고

드디어 만난 3번 시점에서 3번 시작도장을 찍는다. 이번에야 말로 ‘3’자 제대로 나오게 잉크 양도 잘 조절하고 정성을 다해서 꽝.

거꾸로 찍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나. 그 와중에 너무 잘찍혀서 더 슬퍼. 그러니까 올레 여권 도장 페이지는 숫자 옆에 시작 도장, 왼쪽에 조그맣게 중간 도장, 그리고 오른쪽 큰 여백에 완주 도장을 찍으면 완벽하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1번 코스 완주 도장을 잘못 찍어버려 2번 코스 완주 도장을 맵 위에 찍었다. ㅠㅠ


온평포구에서 위미 집까지 40분을 달리며, 어젯밤에 일기예보를 보며 오늘 뭐하고 놀까 검색하던 게 떠올라 헛웃음이 나온다. 한번도 계획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검색은 또 왜 열심히 하는 건지, 이게 뭐라고 뿌듯하게 집에 들어오고 난린지, 이렇게 쉽게 행복할 일인지. 올레 여권 살 때만 해도 열심히 찍을 건 아니라고 했는데 일부러 그거 찍으러 다녀온 거냐고 묻는 김재인어린이한테,일부러 이거 찍으려고 성산까지 간 거 절대 아니다, 갑자기 그렇게 된 것 뿐이다 주절주절 얘기를 해봐도 믿지 않는다. 나의 하루가 늘 그렇 듯. 내 일상이 늘 그렇 듯.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꽤 괜찮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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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2025. 2. 3.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