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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2학기가 시작되었고, 여느 때처럼 나는 겨울방학을 디데이로 세팅했다. 며칠의 부재가 남긴 우리 사이의 불연속 점은 없었는지, 열일곱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는 개학일의 나. 어색함을 녹일 반가운 여유 따윈 허락되지 않는 개학일의 학교. 두 명의 아이가 떠나갔다.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답답함을 넘어선 슬픔을 끌어안고 버틴 시간이 어느덧 한 달. 이제 남은 열다섯의 아이들은 괜찮은 걸까, 계속 내가 품어도 되는 건가 자신이 없다. 추석을 앞두고 미리 들른 친정에서 빛바랜 사진들 틈에 낀 낡은 명함을 본다. 우리 남매의 어릴적 사진과 이제는 모두 돌아가신 아버지의 형제들, 그리고 엄마 사진. 아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모아둔 틈에 영광스럽게 자리잡은 낡은 명함이 낯설다. 나조차도 기억이 선명..

왓포에서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 300m쯤 내려오면 제법 큰 규모의 꽃 도매시장이 있다. 어머니의 날(8월11일)이 가까워 꽃가게가 대목일때라고도 했고, 꽃시장이지만 꽃만 있는 건 아니라는 리뷰에 시장 구경을 가기로 한다. 어머니 날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어버이날 개념인줄 알았는데 태국 왕비의 생일이라는 설명에 엥?하는 나. 곳곳에 왕과 왕비를 모시는 사진을 보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다르다는 게 이런거구나. 생화를 굳이 엮어 장식으로 만드는 익숙한 손길과 앳된 얼굴들의 부조화. 시장통 어린 엄마 옆에서 손가락을 빨며 잠든 아이들. 까맣게 고인 빗물이 튈까 샌들 신은 발과 카메라 든 손에 힘을 주며 걷는 여행자들. 모두가 각자의 몸놀림으로 바쁜 장면들이 이질감 없이 한 샷에 담기는 곳, Pak Khlong ..
출발 전 검색한 방콕의 날씨는 우기답게 비비비였다. 일주일을 꼬박 비가 오리라고 예고하는 웨더닷컴 페이지가 저주처럼 느껴지던 날, 될대로 되라지 생각하며 우산 하나 덜렁 챙기고 잊었다. 빗방울이 잠시 스쳤으나 온종일 평균값이 맑음으로 수렴하던 첫 날의 하늘을 보며 역시 내 운빨은 갓구글도 이기는구나, 잠시 오만했다. 보란듯이 밤새 비를 뿌리고 휴미디티 90%의 촉촉함(!!)을 자랑하는 둘쨋날 아침. 새벽사원을 계획하며 이른 조식을 먹는다. (라고 썼지만 이미 여덟시ㅋㅋ 여행지에서 여덟시 조식이면 새벽밥인걸로 해두자) 하얏트 조식은 가격대비 빈약했다. 풀과 빵을 집어 담으며 소세지도 없다고 투덜투덜하다가 습관적으로 크라상을 토스터기에 넣었는데 숯이 되어 나왔다. 엥? 하고 보니 토스터에 크라상을 넣지 마세..
캐리어를 끌고 그랩을 불러 호텔을 옮겼다. 스쿰빗. 스타벅스와 아봉빵(au bon pain), K's village가 있던 5년 전 그 곳. 추억이 가득한 그 길을 들어서는데 한 세계를 건너 온 느낌이었다. 같은 태국 전통마사지 90분의 가격이 정확히 두 배인 카오산과 이곳의 온도차. 인천공항 면세구역에서 쇼핑에 관심 없어 멍때리다가 습관처럼 들렀던 서점에서 집어온 책 한권이 이번 여행 내내 너무 좋았다.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여행지에서 데리고 다니기 참 모양빠지는 표지라 망설였지만 왠지 그냥 읽고 싶어 데리고 온 아이였는데, 카페에서, 공원에서, 잠시 땀을 식히려던 순간에 뜬금없이 울다가 웃다가.. 나이가 많으니 세상에 무뎌졌을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손끝은 무뎌졌을지 몰라도 할머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