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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대입 자소서를 지도하면서 동시에 고입 자소서를 읽는다. 읽는 자와 쓰는 자의 입장 차이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글자 수에 담지 못한 말들까지 행간에 여백에 꾸역꾸역 실어 담아 호소하는 쪽은 늘 쓰는 자다. 반면 빠르고 정확하게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문장에 담기지 않은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 쪽은 늘 읽는 자다. 고입 자소서에는 유행이란 것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고등학교 2~3년의 활동이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영재원이나 자유학기 또는 학원에서 미는 테마들도 결국 유행을 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몇 년 전까지 대유행하던 황금비, 프랙탈, 스트링아트 등이 최근에 대거 빠지고 그 자리는 아두이노와 파이썬이 점령하는 식이다. 요즘 고입 자소서의 트렌드는 단연 코딩이다. 대입 자소서에도 유..

드라마에 등장하는 흔한 음식 중, 내가 절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양푼 가득 비빈 나물 비빔밥과 잔치국수가 그렇다. 양푼 가득 나물을 비비는 장면이 등장하는 건 둘 중의 하나다. 뭔가 잔뜩 열이 받았거나, 남자 앞에서 깨작이느라 밥을 제대로 못 먹었거나. 일반적으로 이걸 퍼먹는 주체는, 여자다. 나는 이 설정 자체도 맘에 안 들지만, 양푼 가득 담은 비빔밥이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못마땅하다. 아니, 나물이란 음식이 그렇게 냉장고만 열면 대충 있는 거였어? 삶고, 데치고, 무치고, 조물락 조물락 노동은 다 어디로 가고, 열 받은 주인공네 냉장고엔 늘 삼색 나물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단 말인가. 아니 백번 양보해서 다 갖췄다 하더라도 그걸 다 때려 넣고도 부족해 고추장에 나물의 정체성을..
주말 저녁에 남편과 예능을 보며 낄낄대길 좋아하는 내가 요즘 푹 빠진 프로그램은, 전 국민의 주택 로망에 불을 지폈다는 다. TV 속 집들이 동화 같은 거야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집들이 매우 실현 가능한 가격으로 소개된다는 데 있다. 아파트 값이랑 별 차이가 없거나 더 저렴한 집들이 어쩜 그렇게 넓은 마당에 다락에 테라스까지 품고 있는 건지. 그야말로 갬성 넘치는 집들을 바라보며 주택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히 프로그램이 심어준 판타지 탓인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탓인지 잘 모르겠다.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큰 나무 대문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태어나긴 포항에서 태어났다는데 백일 전에 대구로 이사 왔다니 당연히 포항의 기억이 전혀 없고, 처음 대..

- 오늘은 어땠어? 저녁 식탁에서 던진 일상의 질문에 갑자기 목소리가 잠기는 둘째. - 오늘은 슬픈 일이 있었어. 받아쓰기를 20점 맞아버렸어. 이미 눈이 벌게져서 금방이라도 툭 터질 거 같은 표정을 보며 살짝 당황했지만 애써 꾹 눌러 담고 말했다. - 어려웠어? - 아니 선생님이 너무 빨리 불러서 다 못 썼어. - ... 괜찮아! 다음엔 좀 더 빨리 쓰는 연습도 해 보자. 더 연습하면 돼. 아이고 받아쓰기가 뭐라고, 근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그래도 한동안 잘하더니 등교 수업이 오랜만이라 긴장했나, 얜 어떻게 받아쓰기도 이렇게 힘드냐 20점이라니.. 등등의 생각은 다 속으로만 했다. 난 둘째 엄마니까. 괜찮단 엄마 말에 살짝 마음이 녹은 녀석이 한 마디 덧붙인다. - 엄마 근데 왜 20점인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