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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유퀴즈에 어느 정신과 의사가 나와, '환자를 잃었던 순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의사가 환자를 잃은 순간에 대해 뭐라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환자를 잃었다'는 말을 하던 그 순간의 입모양과 목소리 그리고 그냥 그 말 자체가, 나에겐 어쩐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환자를 잃은 순간은 이전과 이후가 참 선명한 경계가 있는 거구나, 정확하게 언제부터 애도하고 아쉬워해야하는지 뚜렷하게 남겠구나 하는 생각. 매일 같은 교실에서 지낸 아이의 눈빛이 더는 이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 아이와 언제부터 마음이 어긋난 걸까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맑은 눈을 빛내며 조잘대던 아이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태도로 삐딱하게 날 바라볼 때, 그 삐딱함이 날 ..
냉방보단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날의 초입에, 수련회를 다녀왔다. 수련회라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코로나 이후는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아득하다. 그런데 어째서, 수련원이라는 곳은 나의 마지막 기억속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걸까.. ‘수련회‘지만 ’수련‘을 목적으로 참가하는 아이들은 없다. ‘집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하룻밤 잔다’가 그저 좋아서 가는 것 뿐. 그러니 출발 전 안전교육부터 나온 ‘휴대전화를 수거한다’는 한마디가 쉽게 납득이 될 리 없다. 평소 학교에서도 걷지 않는 휴대폰을 수련원에서 걷는다니, 차라리 수련회를 안 가겠다는 아이까지 나온다. 교사로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학생들에게 지시해야 할 때다. 아침 8시 집합, 9시 출발 후 수련원 도착..
남편은 출장을 가고, 아이들은 돌아가며 한건씩 해대고, 그 와중에 아빠님까지 입원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건 없는 채 멘탈만 너덜거린 2주가 지났다. 여름방학 전에 가버린 목은 돌아오지 않아 마이크를 절대 놓을 수 없는 상태로 수업을 하고, 7월 초에 투고한 논문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는지 소식도 없고, 호기롭게 시작하려던 연구는 이게 맞나 싶어 멈춰버렸다. 공동 작업은 더디고 개인 작업에는 의욕이 나지 않고, 학교일은 재미가 없고 아이들은 정신이 없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겨우 출근을 하다가 생각했다. 그래도, 2024년의 9월보다는 아주 조금 나아지지 않았냐고. ..아니다. 아주 조금이라니, 그 표현은 틀렸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 깨지고 쏟아지는 상황이 와도, 2024년의 9월보단 나을..
충남고 생활은 어때? 좋아 보이는데. 오랜만에 만난 작년의 인연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좋아 보인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작년보다 더 좋은 걸까.충남고에서 한 학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좋았다. 하지만 그 아주 좋음이 교사로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 쓰지 않기를 꾸역꾸역 해내고 있을 뿐이다.눈앞에서 지적을 해도 게임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욕하지 말라고, 게임 좀 그만하라고, 이제 곧 어른인데 뭐라도 좀 하라고, 그런 잔소리를 꿀꺽 삼키는 것. 골목길 차들 사이를 킥보드로 질주하는 녀석에게 위험하다고 겨우 한마디 건네고, 보란 듯 외면하는 모습을 애써 마음에서 지우는 것. 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