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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가 좋았던 게 아니야 본문

딸공

수련회가 좋았던 게 아니야

딸공 2025. 10. 25. 00:52

냉방보단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날의 초입에, 수련회를 다녀왔다. 수련회라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코로나 이후는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아득하다. 그런데 어째서, 수련원이라는 곳은 나의 마지막 기억속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 걸까..

‘수련회‘지만 ’수련‘을 목적으로 참가하는 아이들은 없다. ‘집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하룻밤 잔다’가 그저 좋아서 가는 것 뿐. 그러니 출발 전 안전교육부터 나온 ‘휴대전화를 수거한다’는 한마디가 쉽게 납득이 될 리 없다. 평소 학교에서도 걷지 않는 휴대폰을 수련원에서 걷는다니, 차라리 수련회를 안 가겠다는 아이까지 나온다. 교사로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학생들에게 지시해야 할 때다.

아침 8시 집합, 9시 출발 후 수련원 도착이 10시 반이었는데, 점심시간 전까지 한 일이라곤 ‘정신교육’뿐이었다. 겨우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허락되지 않은 소지품을 검사 하고 너무 많은 규칙을 정하고 연습한다. 전리품처럼 압수한 물건을 본보기로 앞에 두고 수련원의 ‘지도자’들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압수한 물건이 겨우 컵라면인 건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다.) 긴긴 잔소리 끝에 겨우 숙소에 짐을 풀고 첫 프로그램을 시작한 시각은 무려 오후 2시…  하지만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건, 언제나처럼 나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루 종일 늘어져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할 아이들이, 왜 휴대폰 없이도 밖에서는 반짝반짝 살아있는 건지. 별것도 아닌 프로그램인데 뭐가 그렇게 신나서 열심인 건지. 너무 신나보이는 아이들 표정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오후 내내 담임반 아이들을 따라다녔더니 한 귀요미가 이렇게 말했다.

“쌤, 선생님들은 수련회 이런거 싫어하신다던데, 쌤은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그럴리가.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수련회 젤 싫어할 걸, 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못마땅한 마음을 안 들킨 건 다행인데, 수련회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 건 좀 충격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떠들썩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수련원 밥이 맛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니들이 나보다는 착한 학생들이라, 너무 너무 다행이다. 나는 그냥,, 그 생각 뿐이었다.

‘아가, 나는 수련회가 좋았던 게 아니야. 수련회 와서 신난 니들을 보는게 좋았던 거지.’

아침 첫바람에서 수능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올해 아이들과도 슬슬 헤어짐을 준비할 때다. 올해 나의 학생들이 나보다는 착한 학생들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025년 가을, 수련회가 끝났다.

짚라인에서 내려 수다떨며 걸어오는 아이들 뒤로, 노을은 또 왜 이렇게 예쁘고 난리인 건지.

우리반이 축구를 이겨서 좋았던 게 아니야. 축구 이겼다고 세상 신난 니들을 보는게 좋았던 거지. 사실 난 축구따위 지든 이기든 상관 없는데, 축구 졌다고 어깨 축 늘어뜨릴 니들을 보는 건, 정말 싫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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