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흔한 바람소리에 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더 잘까 뒤척이다 포기하고 나온 시각이 여섯시?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 생각하며 아이패드를 열어 오늘의 여행지를 확인하는 나. 원래 계획을 세우는 인간이 아닌데 집에 갈 날이 다가오니 남은 날은 최대한 알차게 보내야겠단 생각에 계획이란 걸 세워보게 되더라. 더구나 오늘은 남은 날 중 하루 종일 비예보가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비오는 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세운 오늘의 계획은 제주한란전시관, 카페 오렌정원, 그리고 점심으로 돈내코 손두부를 먹는 것이었다.

첫번째 난관. 제주한란전시관은 수요일에 휴무라고 한다. 그에 맞춰 카페 오렌정원도 오늘 쉬는 날이었다. 데스크앤테이블에 가서 가지튀김을 먹고 동백화방을 한번 더 찍자는 대안이 떠올랐지만 두 곳 모두 오늘 휴무였다. (서귀포는 수요일 휴무가 유행인가봄.. ) 가볍게 돈내코 손두부를 먹고, 휴애리나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네이버에서 예매를 했다. 어린이 무료 입장 행사중이란 말에 잠깐 행복했다.

오늘따라 재인이가 안 일어난다. 열시가 가까운 시각까지 늦잠을 자는 녀석을 흔들어 깨워 아침을 먹인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가볍게 시리얼로 때우고 오늘치 영어공부를 빡세게(?) 시키고, 드디어 출발. 을 하려고 하는데 두번째 난관. 갑자기 차에서 엔진경고등이 뜬다.

ㅠㅠ


가끔 센서 오류로 경고가 뜰 수도 있다기에 시동을 끄고 기다렸다 다시 켜보았지만 평소와 증상이 다른 것 같다. 그 와중에 계속 주행할 수 있다는 말이 어찌나 고마운지. 몰라 일단 밥이나 먹자 싶어 돈내코 손두부로 출발하는데 뎀. 차가 안 나간다. 출력제한이 걸리는 듯 변속도 제대로 안 되고 엑셀을 밟아도 rpm은 올라가는데 속도가 오르지 않는다. 주행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일단 돈내코까지만… 뎀. 오르막에서 멈춰버렸다. 헉... 가까운 카센터를 검색해 일단 들어갔다. 저 차가 안 나가요. 수입차 수리 되나요. 내가 방문한 시각은 11시반.. 점심시간이 걸리니 밥부터 먹고 1시 반까지 오라고 한다. 난 돈내코에 가서 두부를 먹고 싶었지만 중산간에 있는 돈내코까지 언덕길을 도저히 오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식당 아무데나 검색해서 들어가 돼지국밥과 몸국을 시킨다. (그 와중에 구글 별점 확인했고, 그 집은 돼지국밥 맛집이어서 재인이는 매우 만족) 하지만.. 집에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한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는 사랑스런 나의 미니가 갑자기 저러니 나는 밥이 안 넘어갔다. 대충 먹고 다시 카센터에 가서 기다리길 한시간. 점검기 물려 스캔해보더니 에러코드가 다섯개나 뜬다고.

ㅠㅠ


- 수리할 수 있나요?
- 네 그런데 최소 일주일 이상 잡으셔야 해요.
- 네? 전 금요일에 배타고 나가야 하는데요.
- 그럼 여기선 어려워요.


그와중에 귀엽던 카센터집 댕댕이 봄이


으앙. 급하게 소환한 서끄씨가 미니 동호회 카페를 뒤져 수입차 수리 전문업체가 신서귀포에 있다는 정보를 물어다 줬다. 카센터에서 신서귀포 업체까지는 13km.. 하지만 불안해서 너무 무섭다고 하는 재니를 데리고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일단 집에 데려다 주고나니 업체까지 거리는 21.5km.. 최대출력 35km/h인 상태로 신서귀포까지 가보자. 계속 주행해도 되는 거 맞나.. 주행할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이제 못미덥기 시작했지만. 견인하긴 너무 먼 거리다, 일단 출발.

위미에서 서귀포 시가지를 지나 강정까지 가는데 언덕은 또 왜이렇게 많은지. 내리막에선 그나마 갈만하다가 오르막만 만나면 거의 서다시피 하는 상태. 중간중간 껴있는 어린이보호구역이 너무 감사할 지경이었다. 강정천 지나 마지막 언덕배기 오를 땐 7km/h까지 속도가 떨어져서 비상등 켜고 갓길 주행으로 겨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머릿속으론 배편을 미룰 수 있나, 숙소는 연장이 되는 건가, 다음 주까지 있어야 한다면 차를 탁송에 맡기고 비행기를 타야 하나 온갖 경우의 수를 다 떠올리며 대책을 마련(할 궁리만)함..

제주에선 여기가 성지라고 한다.
입원한 차량만 여러 대..
빼꼼 보이는 나의 미니


수리는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부품이 오는데 며칠 걸려서 빨라도 금요일 밤, 늦으면 토요일 오전에나 가능하다고. 난 금요일 배로 육지에 나가야 하는데요,, 더 빨리는 안 되나요? 부품이 금요일 오전에 항공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그게 최선이란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 일요일에 나가는 배가 있나, 차량 선적 가능한가 확인하고, 숙소에 전화를 걸어 일요일 아침 체크아웃이 가능한지 확인한다. 숙소도 배편도 모두 문제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수억 깨진 수리비가 떠올랐지만 모르겠다 이미 벌어진 일. 제주에 오지 않았더라도 고장날 차는 고장이 났을 일이다. 제주에 와서 돈이 좀 더 들었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속편히 차를 맡기고, 수리비에 수억이 든 기념으로 택시 대신 버스를 타기로 한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와서 배차표를 보는데 다음 차가 무려 45분 뒤에 있네? (제주도의 노선 중 상당수는 지도 앱에서 실시간 정보 제공이 안 됨..)


생각해보면 택시비는 미니쿠퍼 수리비에 비하면 푼돈이다. 바로 택시를 잡아 탐. 하지만 목적지인 위미까지 택시를 타긴 양심에 걸려서 (라기보다 너무 돈이 아까워서) 환승지인 서귀포 중앙로터리까지만 택시로 이동, 하지만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눈 앞의 510번이 떠나는 걸 보며 생각했다. 아 저것이 나의 오늘 세번째 난관이구나. 몇구간 더 걸어 10분쯤 기다렸다가 다른 버스를 탄다. 숙소 29m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는게 오늘처럼 고마웠던 순간이 있을까. 한시간 반 걸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시간이다.

- 재인 나 너무 힘들어 우리 씨유가서 라면 사다 끓여먹을까?
- 완전 좋음!
- 가는 길에 위밋 들러 붕어빵도 살까?
- 그건 더 좋음!

그렇게 씨유까지 걷다가 위밋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계란라면과 볶음밥까지 먹게 되었다.

오늘따라 구름이도 아니고 무려 낯가림쟁이 별이가 우릴 반겨주었다.
고양이 모양으로 담아준 볶음밥과 귀여운(!) 밑반찬 그리고 동백차 : )
별별별
불확실한 상황이 다 해결되고 위밋에 앉아 지는 해를 보는데 갑자기 긴장이 슥 풀리더니 행복해졌다.


위밋에서 차려주는 밥을 먹다보니 하루 종일 품고있던 긴장이 풀리면서 노곤해진다. 생각해보면 집에가는 날 아침에 차가 갑자기 고장 안 난게 어딘지. 딱 적당히 고쳐서 떠날 수 있는 날 뻗어준 미니에게 고맙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하룻밤 연장 가능한 숙소도, 적당히 남아있던 배편도 그냥 다 다행이잖아. 지난 주 내내 눈이 와서 제대로 못 논 것도 있고, 멀리까지 여행다니느라 오히려 가까운 동네 산책을 실컷 못한 것도 아쉬웠는데 이렇게 된 거 2박 3일은 뚜벅이로 동네 여행을 실컷 해보면 좋겠다, 배부르게 밥을 해치우고 재니랑 이런 얘길 하며 돌아오는데,,

아이폰 달사진은 이게 최선이다


세상에 오늘은 정월대보름이었다! 완벽하게 둥근 보름달이 쌩하고 떠준다. 물론 난 달 따위에 소원을 비는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 보름달한테 우리 집에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소원을 빌진 않았다. (달님 제발요..!! ) 그냥 달을 보니 기분이 좋았을 뿐이다. 그냥 달도 아니고 정월 대보름 아닌가! 게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맑은 하늘이라니.

암튼 비싼 댓가를 치르고 이틀의 시간을 더 얻었다. 집에 가자마자 출근인 것만 빼면, 괜찮다. 세 번의 난관쯤, 별 거 아니다. 비싸게 얻은 이틀인만큼 내일과 모레는 열배쯤 더 행복할 예정이다. 구름이와 별이가 있는 위미에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We meet at Wimi  (0) 2025.02.15
어쩌다 올레길  (2) 2025.02.03
2025, 1월의 제주 :)  (1) 2025.01.25
나의 두 번째, 혼자 여행  (2) 2020.10.13
나의 첫 혼자 여행  (3) 2020.10.11
by 딸공 2025. 2. 12. 19:35
|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