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내내 제주에 있다가 잠깐 대전에 온 날 밤, 큰아이를 데리러 둔산에 나갔다. 목요일 밤 열 시의 둔산동 학원가, 픽업 차량들로 뒤범벅이 된 틈에 겨우 자리를 잡고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둘째 또래의 꼬맹이들부터 큰놈 또래의 고등학생들까지 와글와글 오가는 불빛과 열기가, 마치 떠나온지 오래된 과거의 필름을 꺼내보는 것 같았다. 이 곳은 내가 발 담근 세계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없다,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왜 눈물이 났을까.
카이스트 캠프를 보낸 아이들도, 일본 국제교류를 간 아이들도, 건너건너 소식이 자꾸 들어온다. 그래도 아직은 학년부장이라고 그들의 소식에 나를 끼워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카메라를 보면 브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아이들, 그래 바로 내새끼들이지, 반가움에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자꾸 마음이 아리다.
아이러니하게도 학년을 마무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겪어보니 정말 좋았다.’는 인사였다. 정말 또라이인 줄 알았는데, 진짜 평이 별로여서 걱정 많이 했는데, 겪어보니 정말 좋았다고. 동료 교사들이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의 서술이 그러했다. 이제는 딱히 억울할 것도 없다.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할 뿐이다.
꽤 많은 일들을 미뤄둔 채로 지내고 있다. 생기부 검토도 해야하고 논문도 써야하는데 그냥 하고 싶어질 때까지, (혹은 진짜 더 미루면 큰일나버릴 것 같을 때까지) 버티는 중이다. 잠깐 들러본 학교에는 종례신문 제본판도, 수학달력도 모두 도착해 있어, 비워둔 내 자리가 다시 택배로 빼곡했다. 2월에 있을 이틀 간의 등교일 동안 모두 떠나보낼 것들이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단순하다. 아침을 해먹고 손 설거지를 하고, 재인이가 하루치 최소한의 공부를 하는 동안 옆에서 책을 읽다가 끝나면 나가서 같이 걷는다. 집앞 올레길 5번 코스를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조금 나가 오름을 걷기도 한다. 걷다가 적당한 시간에 주변 맛집을 검색해서 점심을 사먹고, 조금 더 걷거나 카페에서 쉬다가 집에 돌아온다. 늦은 오후에는 커피를 한 잔 내려 놓고 책을 읽거나 퍼즐을 맞춘다. 저녁 후엔 빨래를 해서 널고, 청소를 하고 하루를 닫는다. 단순하고 나른한 시간들이 모여, 꽤 괜찮은 하루가 완성된다.
곧 발령이 날 것이고 3월이면 또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좀 게을러도 좋지 않을까.
제주는 여전하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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