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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이 뭐죠 본문

딸공

참교육이 뭐죠

딸공 2026. 6. 22. 13:26

한 반 재적은 평균 23~25명인데, 매 수업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아이들이 3~4명씩 있다. 쉬는 시간에 뭐 했냐고 물으면 아까는 안 급했다고 한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거고, 수업 시간에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참는 거라고 하면 한 번만 보내달라고 한다. 화장실을 놓고 흥정해봐야 인권침해 소리가 나올 게 뻔해서 그냥 가라고 한다. 그러면 다른 놈은 물을 뜨러 가겠다고 한다. 길게 말하기 싫어 그냥 가라고 한다. 매 시간 반복되는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학생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수업은 해본 적이 없다. 초1이 아니라 고3이다.

쉬는 시간은 더 난장판이다. 휴대전화를 끼고 살던 몇 달 전까지는 온갖 욕설과 괴성을 지르며 앉아서 게임을 했다. 4월 1일자로 휴대전화를 수거한 뒤에는 그냥 뛰어다니며 욕설과 괴성을 지른다. 조용히 앉아 공부하는 풍경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와 무관하게 등교부터 하교 시각까지 잠만 자는 아이들이 반마다 2~3명씩 있다. 너무 잠에 취해 밥시간도 챙기지 못하고, 이동 수업을 놓쳐 미인정 결과도 수시로 찍힌다. 고3인데 공부 안 하냐고 물으면 어제 스카에서 새벽까지 했다고 한다. “저 요즘 거짓말 안 보태고 존나 열심히 해요. 진짜 제가 보여드릴게요.” 처음에는 귀여웠는데, 그것도 몇 달을 보고 있으니 무력감에 내가 지친다.

교실의 모든 규칙은 매시간 각자의 사정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협상된다. 수업은 모두가 함께 견디고 지켜야 하는 공동의 시간이라는 합의 자체가 이들에게는 없다. 각자의 욕구가 생길 때마다 얼마든지 중단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규칙은 미리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 그 순간 힘이 남아 있는 쪽이 포기할 때까지 밀고 당기는 협상의 대상이다. 

“그랬구나, 속상했구나” 하며 마음을 읽어주라는 오은영식 공감 육아가 08년생들 전후로 대유행이었다. 몇 년 전 근무하던 학교에서 아이가 넥타이를 두고 갔는데, 밤늦게 기숙사로 갖다줘도 되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넥타이가 없으면 잠깐 혼나면 그만이지, 굳이 이 밤에 한 시간을 운전해서 갖다줄 만큼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답했다. “아니, 혼나면 어떡해요……”라며 울 것처럼 말하던 학부모는 결국 밤늦은 시각 넥타이를 가지고 기숙사로 왔다. 

한 번도 혼나보지 않고, 자기 불편을 스스로 감당해본 적 없이 자라면 어떤 인간이 되는가를 매일 본다. 성인이 되기까지 반년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세상에 나갈지 걱정스럽다가도, 이들에게서 발견하는 순종의 패턴을 보고 있으면 그냥 이게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인가 싶어 더 아득해진다. 실질적인 불이익을 줄 수 없는 권위는 끊임없이 시험하고 협상하지만, 이미 강하다고 인정된 서열 앞에서는 빠르게 순종한다.

자리를 옮기는 일에도, 휴대전화를 걷는 일에도 설득과 납득이 필요하다. 눈곱만큼의 억울함과 불편함도 참지 못한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는 그래도 되고, 전교 1등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건 지들이 게을러서 그런 건데 누구 탓을 하냐”는 논리는 흔하다. “장애가 있는 건 누가 그렇게 태어나랬냐, 지 팔자지”라는 상종조차 못 할 논리도 나온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네가 만약 그 입장이 되면 어쩔래?”라고 하면, “그럼 전 죽은 듯이 살 거예요. 아니, 그냥 뒤질까?”라고 웃는다.

10대들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만난 아이들은 좌도 우도 아니다. 어떤 철학과 역사관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념을 갖기 전에 사회의 기존 서열을 자연의 질서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부자는 부자일 만해서 부자이고, 1등은 1등 할 만해서 1등이며, 실패한 사람은 실패할 만해서 실패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불평등을 바꾸려는 시도는 누군가에게 부당한 혜택을 주는 일이 되고, 이미 정리된 서열을 흔드는 행위 자체가 불공정이 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태도는 ‘우경화’라고 부를 수 없다. 이념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에 가깝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질서 말고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우지 못했다. 경쟁의 결과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공동체의 규칙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강자에게는 순종하면서 약자가 받는 보호에는 분노한다.

아이들의 감정을 존중하라고 하면서 교사에게는 감정 소진을 견디라고 하고, 연대와 시민성을 가르치라고 하면서, 교실 밖에서는 성적과 돈으로 정리된 서열을 자연법처럼 가르쳐왔다. 그리고 그 결과, 교사의 말에는 끝없이 “왜요?”라고 묻지만, 돈과 성적과 성공이 명령하는 질서에는 “왜요?”라고 묻지 않는 아이들이 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봤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교사니까 그런 드라마가 위로가 되지 않겠냐, 시원하지 않았냐는 의미도 따라붙는다. 물론 봤다.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특전사 출신 교권보호국 감독관이 힘으로 밀어버리는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실제로도 필요하지 않냐는 질문은, 몇 주 전 나를 엉엉 울게 만들었던 “힘든 반이라 남교사한테 맡기려고 했는데”라는 말과 완벽하게 닮아 있다. 여초 집단을 향한 은근한 조롱과 혐오는 덤이다. 결국 지금 학교가 이 지경인 건 교사가 약해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교사를 위하는 척 돌려 말한다.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밈으로 소모되는 것을 넘어 이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와중에 이 드라마에서 교권이 educational right로 번역되는 건 블랙코메디인건가?

나는 오늘도 화장실에 가겠다는 아이에게 가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는 물을 뜨러 가겠다는 아이에게 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서열에 순종하듯, 나도 교실의 패턴에 적응하는 중이다. 평화로운 나의 교실에, 참교육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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