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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은중과 상연, 잘 잊혀지기 위한 준비. 본문

딸공

은중과 상연, 잘 잊혀지기 위한 준비.

딸공 2025. 12. 29. 22:26

주말 오후, 베란다 캠핑장에 난로를 켜고 릴렉스 체어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넷플릭스를 더듬다가 ‘은중과 상연’을 봤다. (아니, ‘보고 말았다‘) 누군가 추천했던 기억이 있었고, 잠시 본 화면이 나쁘지 않아 가볍게 클릭했는데, 01학번 사진 동아리가 배경인 드라마라서 내 기준 몰입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설정이었던데다, 생기부와 논문 마감일이 턱밑까지 다가온 가장 바쁜 주말(_즉 가장 일하기 싫은 주말)이라는 개인적 맥락적 배경(!)까지 겹치다보니 결국 정주행, 끝을 보고 말았다… (금토 꼬박 밤 샘-_-)

Pentax MX에 TX400을 감아 넣고 출사랍시고 돌아다니던 시절의 기억과, 인화지를 디벨로퍼에 담가놓고 타이머 돌려가며 기다리던 동아리 암실의 기억이 몰랑몰랑하게 떠오르는 초반부는 참 좋았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드라마도 현실도 나쁜년은 끝까지 잘 먹고 잘 살아주는 게 매너인데, 어쩌자고 이 드라마는 기껏 만든 나쁜년을 죽을병 따위에 걸리게 만들었을까. 어린시절의 애정결핍으로 커버하기엔 40년의 썅년 짓은 너무 길고 깊지 않았나. 결국 떠나는 순간까지 썅년이네. 그런 생각.

‘너는 참 좋겠다’에 겹쳐 보이던 어떤 얼굴과, 사진은 시간을 채집하는 거라던 대사, 그리고 드라마를 보느라 밀린 나의 일들만 남았다. (비추란 소리임..)


12월이 되면 한가해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당연히 착각이었다. 1심 이후 남은 수정 작업은 더디고 힘든 것보다 ‘하기 싫음’과의 싸움이었다. ‘이 연구가 끝나면 후속연구는 어떤 방향으로 계획하고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후속 연구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으악 전 이 주제는 진짜 더는 안 보고 싶어요!’ 라고 해버렸다. ’아 선생님, 이제 진짜 끝날 때가 됐나봐요, 정상입니다!‘ 그가 말했다. 12월은 그렇게 가버렸다.

이번 학기 시간표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월요일 1교시가 담임반이네? 가끔 아침이라도 같이 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한 번도 뭘 하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김밥을 말아도 몇번을 말았을 것이고, 라면을 끓여도 몇번을 끓였을 텐데,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잠에 취해있는 충남고의 월요일 1교시에 감히 뭘 하자는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면 핑계일까. 마지막 월요일이었던 오늘 아침, ‘참치 샌드위치 먹을래?’하고 반톡에 툭 던졌더니 몇명이 네, 한다. 먹어준다는 답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잘 먹겠습니다, 두 손으로 받아가는 아이들이 참 예쁘고 고마웠다. 끝까지 엎어져있는 녀석들은 깨우지 못했지만, 맛있게 먹어준 아이들이 있으니 그거면 됐다. 모닝빵에 참치스프레드를 끼워 넣으며,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생각했다. 아마도 내년에는, 더 이상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겉으로만 잘해주고 뒤에서 자기 밥그릇 잘챙김’이라던가, ‘남들보다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꼴봬기 싫더라 항상 남 깔보는거‘라던 댓글이 머릿속에 툭하고 던져질 때가 있다. 내 이름을 후보로 올리고 누가 더 싫은지 투표를 해보자던 글도. 떠오를 때마다 툭 하고 마음이 무너지는 기억들. 한마디 대꾸도 해보지 못한 나를 향한 비난들로부터 나는 여전히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도, 최소한 교직에 있는 동안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함께 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너무 두렵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택하기는 너무 아깝다. 받아주는 아이들은 마냥 예뻐해주고, 튕겨나가는 아이에게는 마음을 쓰지 말자. 올해를 보내며 주문처럼 외운 마음을, 잠자는 아이들 뒤통수에 대고 한번 더 외워본다. 나는 지금 괜찮다고.

올해 반 아이들과는 연극도 뮤지컬도 보러가지 못했다. 내일 모레는 방학식이고 더는 시간이 없는데, 학기초에 신청해둔 아트키움 포인트를 핑계로 2월에 뮤지컬을 보러가자고 던져본다. 마지막 용기와 아주 조금 남은 미련을 담아. 내년도 업무분장희망원에는 ‘3학년 담임’을 써냈다. 몇가지 권유가 있었지만, 그냥 담임 한 해 더 할게요, 했다. 그렇다고 내년에 더 좋은 담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냥 올해 나쁘지 않았다, 정도. 내년에도 나쁘지 않으면 좋겠다, 정도.

구글 포토에 들어있던 사진을 고르고,
종례신문의 마지막호를 편집해 인쇄소에 넘겼다.
주문한 학급 달력이 도착했고,
성적표를 출력했다.
그러니 이제, 방학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몇가지 잡다한 일을 끝내고, 드라이브 공유를 해제하고, 반톡과 연락처를 지우는 것으로 나의 충남고 첫 해는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는 헤어짐의 순간부터 시작될 것이다. 잘 잊혀지는 교사가 되면 좋겠다. 두고두고 떠올리며 억울함과 원망이 남는 교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잘 생각이 안 나는 선생님, 그냥 그 정도면 딱 적당하겠다.

2025년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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