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여기까지?
방학이 3일 남아 다행이지. 본문
2025. 7. 14. 08:34 2학년 교무실
당겨받았습니다. 2학년 교무실 OOO입니다.
- 아니, O반 담임 자리에 없어요?
네 수업가셨는데요, 무슨 일이신가요? 말씀 전해드릴까요?
- 아니 내가 지금 서류를 떼러 몇 번을 왔다갔다했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얼마나 바쁜데 지금 담임이라는 사람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버님, 지금 O반 담임선생님 수업가셨다고요.
-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냐고. 처음부터 똑바로 안내를 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대체 사람을 몇번을 왔다갔다 하게 만들고 말이야!!
저기요. 아버님. 화가 나시는 건 알겠는데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아버님 화나게 한 건 아니잖아요. 지금 통화중에 점점 더 화를 내면서 언성을 높이시는데, 지금부터 녹음하겠습니다. 마음 가라앉히고 말씀하세요.
- 뭐? 녹음?? 녹음 해 하면 어쩔거야 아니 학교가 말이야 담임이라는 사람이 똑바로 안내를 했으면 내가 이렇게 전화를 했겠냐고!
긴 통화끝에 알아낸 상황, ‘부모의 형제 자매 또는 그 배우자의 상’에 해당하는 사유로 인정결석처리를 해야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가족관계증명서가 한 부로 해결이 안 되니 몇다리 건넌 관계를 모두 입증할 수 있는 가족관계증명서를 2부 이상 내라고 한 게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명의의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거기서 증빙이 안 되니 추가로 서류를 요청했고, 이것 때문에 한번에 안내를 똑바로 안 해줬다고 화가 났다는 거다.
자. 아버님. 지금 전화하신 목적이 그러니까 뭐예요? 서류를 뭘 내야되는지 추가로 확인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님 화가 났다고 소리지르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담임선생님께 사과를 받고 싶으신 거예요?
- 사과해야지! 담임이 말이야 똑바로 안내를 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요, 안그래요?
네 근데 제가 담임이 아니잖아요. 저한테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지금 계속 언성 높이고 계시잖아요.
-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가 나게 생겼냐고 안 생겼냐고
화가 난다고 다 화를 내도 되는 건 아니죠. 엄청 바쁘시다면서요. 아침 8시 30분에 학교에 전화하신 목적이 단지 ‘나 화났으니 담임 사과해라’ 인 게 맞나요? 아버님 제가 볼때 아버님은 별로 안 바쁘신 거 같은데요. 지금 이 전화를 받고 있는 제가 더 바빠요. 제가 뭐하느라 이 아침에 아버님 화난 사연을 다 듣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서류 더 안내 해드려요? 아님 그냥 계속 화 내실 거예요?
- 아니 뭐 이래 불친절해? 학교가 지금 이렇게 응대하는게 말이 돼? 그러니까 담임이 처음부터 말이야
제가 담임 아니라고요. 그리고 아버님이랑 대화해보니 O반 담임선생님 되게 힘들겠다 싶네요
- 아니 뭐라고? 처음부터 안내를 똑바로 했으면.. 어 ? 교사들은 말 한마디 띡 하면 끝이지만 우리는 그 말한마디에 왔다갔다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말 한마디 띡이라죠. 처음부터 완벽하게 안내했다면 좋았겠죠. 근데 교사도 사람인데 어떻게 모든 걸 한 번에 완벽하게 안내해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그게 서운하시면 서운하다 말하시면 될 일이지 이렇게 전화해서 소리지르는게 맞나요? 그리고 아버님, 말 한마디 띡이라뇨. 말 한마디씩만 해도 교실에 스물 여섯명 학생이 있어요. 각각 부모님들까지 하면 곱하기 2예요. 아버님같은 전화 하루에 52통씩 오면 교사들이 살 수나 있겠어요? 지금 아침부터 전화해서 이렇게 따지고 화낼 상황인지 저는 전혀 이해가 안되고요. 무엇보다 아버님 전화에 제가 지금 몹시 기분이 나쁩니다. 제가 뭘 잘못해서 아침부터 이런 전화를 받아야 하죠?
- 아니 이게 무슨. 학교가 왜이래?
학교가 왜이렇다뇨. 아버님 지금까지는 그렇게 전화해서 다짜고짜 화만 내면 그냥 다들 죄송하다고 납짝 엎드려왔나요? 오늘도 그걸 기대하고 전화하신 건가요? 전 아버님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지금 이 상황은 제가 완전 피해자인데요.
-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이 상황이면 화가 나겠냐고 안 나겠냐고요.
아버님. 됐고요. 저 지금 진짜 화나는데 참고 있는 겁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사과 하시죠. 저 지금 되게 바빠요.
- 아니.. 그러니까. 아 내가 소리지른 건 미안합니다. 근데 담임이..
예 사과하셨으니 일단 받겠습니다. 서류 안내 더 필요하세요? 아님 그만 끊으실래요?
- 아 진짜 뭐하자는 거야 학교가 뭐 이래
아버님. 사과 하셨으니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런데요, 담임선생님한테도 예의 갖추세요. 그리고 아버님… ^^ 좋은 하루 되세요!
- 아 씨발.. (전화 끊음)
그리고 5분 뒤에 아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 좀전에 저희 애들 아빠랑 통화하셨어요?
네
- 아이 아빠가 불뚝 성질이 있어서 화가 많이 났어요. 담임선생님이 처음부터 안내를 잘 못해서..
어머니.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불뚝성질이 있다는 거, 화를 못 참는거, 자랑할 일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죠.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다는 게 아이 학교에 전화해서 당당하게 이해를 요구할만한 사안은 아닙니다. 담임선생님이 실수가 있었다면 정정을 요구할 수도, 사과를 요구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같은 사안에 대해 화가 안 나셨나요?
- 아유 제가 무슨 화를 내요
그러니까요. 어머니는 화가 안 나는 사유로 아버님은 왜 화가 났을까요. 화를 참지 못하고 학교에 전화해서 소리를 지르는 건 아버님 개인의 문제지 담임선생님이 감당해야 할 잘못은 아니란 거죠. 학교에 불만이 있을 수 있죠. 그럴 땐 두분이 맥주라도 한 잔 하시고 학교 뒷담화라도 하세요. 학교에 전화해서 소리지르고 화내실 게 아니라요. 그게 맞아요. 혹시 제가 더 안내해드려야 할 일이 있으신가요? 전화를 왜 하신 건지요?
- 팩스로 서류 보내드릴 건데 번호가 필요해서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한데요, 저는 별로 개의치 않으니 담임선생님께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교사는요, 이런 일 겪고 나면 애가 진짜 안 이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 힘들게 하는 부모, 그 자식을 예쁘게 보긴 쉽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담임선생님께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매우 위협적으로 느꼈습니다. 학교가, 교사가, 대체 얼마나 만만하고 쉬우면 이런 전화를 하실까 싶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아버님과의 대화는 모두 녹음해 두었습니다. 지금 어머님과의 대화도 녹음되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실까요?
-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네 어머니, 좋은 하루 되세요!
다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부모의 아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걸로, 교사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누구인지 알고서도 진심으로 예뻐해 줄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2학년 교무실에 나밖에 없어, 그 전화를 내가 당겨 받아서, 다행이었다. 현 교무실 멤버 중 내 승질이 가장 더러운 건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방학이 사흘밖에 남지 않아 참 다행이다.
방학이 만약 일주일 쯤 남았더라면, 생글생글 웃으며 좋은 하루 보내란 인사까진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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