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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넌 고양이처럼, 본문

딸공

넌 고양이처럼,

딸공 2025. 6. 14. 23:52

매일 칼퇴만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교의 시간은 밤이다. 대전에 처음 왔을 때, 모든 게 낯설던 그 길 위에서, 갑자기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어두컴컴한 학교에 늦게까지 켜진 불빛을 본 순간이었으니까.

충남고에 와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까만 하늘 아래 빛나는 교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일반고가 그렇듯, 야간자율학습이 말 그대로 ‘자율’이기 때문이다. 대신 충남고의 밤에 가장 빛나는 곳은 교실이 아니라 운동장이다. 하루의 열기가 모두 빠진 시각에도, 심지어 주말에도, 운동장은 누군가로 늘 채워져 있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예쁜 모습이 운동장 위에는 항상 있다. 수업을 하다 문득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에도, 고개를 돌리면 운동장이 보인다는 게 꽤 위로가 된다. 다행이다.

아이들이 체육대회 상으로 학급비를 벌어와 치킨을 먹으러 갔다. 치킨 배달료만 6~7천 원씩 받는 동네에 근무하다가 시내로 오니, 쓰레빠 신고 걸어나갈 수 있는 거리에 치킨집이 여러 개다. 비 오는 13일의 금요일. 굳이 비를 맞아가며 나가서 치킨을 먹고, 헤어진다. 이제 제법 편안해졌는지 종알종알 떠드는 녀석도 있고, 여전히 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입을 닫아버리는 녀석도 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물러서는 모습이 고양이 같아 괜히 마음이 아리지만, 애써 덤덤하게 말을 걸어본다.

날이 더워지길래 오랜만에 머리에 미친 짓(?)을 했는데, 뜻밖에 아이들이 너무 관심을 가져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터 남자애들이 이렇게 내 머리에 관심이 많았지. 봐달라는 건 외면하면서, 생각도 못 한 일에는 기막히게 반응한다. 남자애들을 둘이나 키웠지만, 여전히 남자아이들은 기묘하고, 가끔은 외계인 같다.

충남고에 근무한 지 꼭 백일이 되었고, 이제 34일 후면 여름 방학이다. 계획했던 많은 것들을 해냈고, 그럼에도 여전히 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적당히 마음을 써가며, 겨우내 모아둔 마음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잘 버티고 있다.

매일매일 방학을 기다리고 있지만, 출근이 싫어서는 아니니다. 학교는 좋지만, 학교를 안 가는게 조금 더 좋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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