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여기까지?
그럴 때가 있지 본문
그래 그럴 때가 있지. 분명히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한 조가 되었는데, 조별 과제는 왜 다들 열심히 하지 않는 건지, 똑같이 나눠 갖자니 일이라는 게 그렇게 뚝뚝 잘라지지 않고, 앞에서 이끌고 가자니 자꾸 부족한 게 보여서 더 잘하고 싶고, 욕심을 내다보니 결국 나만 힘들고, 열심히 좀 하자고 한마디 했더니 분위기는 싸해지고. 각자의 일에는 다들 열심이면서 왜 조별 과제는 결국 나만 하는 건지, 무임승차라고 하기엔 뭔가 애매한 이 상황.
그래 그럴 때가 있지. 결국 힘든 건 난데, 욕먹는 것도 나인 것 같고. 그런데 완성된 과제는 우리 모두의 것이고. 더 애쓴 사람과 덜 애쓴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결과는 똑같이 나눠 갖게 되고, 지친 나는 내 것을 못 챙기고, 마음은 속상하고 억울한데 결국 이것도 내 성격 탓인가 싶어 더 슬픈 상황.
그래 그럴 때가 있지. 나는 더 잘하고 싶은데 왜 다들 딱 거기까지만 하는 건지, 능력 없는 것도 아니면서 조별 과제니까 딱 선을 그어버리는 친구들이 얄밉고, 한편으로는 저게 맞는 건가 싶어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상황.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쉬지 않고 아등바등해낸 건 난데, 옆에서 말만 보태던 사람들이 홀랑 공적을 나눠 먹어버리는 그럴 때. 아니 그럴 거면 입이라도 닫고 있던지 말은 또 왜 그렇게들 많은 건지 나만 바보같이 느껴지는 그럴 때. 아이고, 멀리 갈 것도 없어! 어디 엠티만 가도 그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하고 밥 차리는 사람 따로, 실컷 자고 일어나 꽃단장하고 처먹는 사람 따로. 뭐지, 나는 바보인가 싶은 그런 상황.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내 일과 우리 일의 경계를 두지 않았는데, 뭐든 열심히 한다는 게 결국 호구가 되는 건가? 그렇다고 대충하려니 성미에 안 차고 잘하려니 나만 힘들고. 사람들을 들볶자니 분위기만 싸해지는 그런 상황.
참, 있잖아. 난 그런 때도 있었어. 하루 종일 학교에서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유난히 바빴던 날이었는데, 퇴근 길에 수고한 나를 위해 라떼 한 잔 먹어야겠다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지나던 스타벅스 DT에서 “아이스 카페 라떼 샷 추가하고 우유 대신 두유로 바꿔주세요”라고 했지. 라떼를 받아드는 순간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던지. 이거 먹고 나면 진짜 호랑이 기운이 솟겠다 싶었어. 하루 종일 힘든 마음을 진짜 보상이라도 받는 것 같았거든. 바로 맛볼까 하다가 뒤에 차가 있어 컵 홀더에 꽂아놓고 차를 몰아 나왔어. 그리고 조금 더 가다가 빨간불이 들어오는 순간, 멈추고 드디어 한 모금을 쭈욱 빨았지.
그런데 그건, 두유가 아니라 우유였어. 세상에! 그 라떼는 그냥 라떼가 아니었거든! 나의 힘든 하루를 보상하는 정말 그야말로 나를 위한 선물, 나를 위한 유일한 힐링의 약 같은 거였단 말이지. 그런 라떼가 내 주문과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게 말이 돼? 그건 정말 상상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응 나는 신호 대기 중인 차에 앉아서 엉엉 울어버렸어. 초록 불이 들어오고도 한참을 울다가 더는 참지 못한 뒤 차가 빵빵거릴 때까지, 엉엉엉 울어버렸어.
커피 주문이 잘못 들어갔다고 우는 게 말이 되냐고? 응 그럼 말이 되지. 좀 미친 것 같지만 사실이야. 실컷 울고 나니 어찌나 시원하던지 호랑이 기운이 솟긴 하던데. 난 아직도 그날 운전석에 앉아 울던 나를 기억해. 어쩌면 그날 그 커피가 잘못 만들어진 덕분에 실컷 울고 마음을 풀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해. 완벽한 커피였다면, 그걸 먹고 다른 이유를 잡아서 울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지.
그러니까 니가 오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엉엉 울어버린 건, 별거 아니야. 그때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냥 울고 싶었을 거야. 맞아,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떠든거야.
그리고 있잖아, 그렇게 나서서 일하고 또 힘들고 지치는 거, 아마 평생 그럴 거야. 그것도 성격인데 사람은 잘 안 변하거든!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하기로 했냐고? 아, 나는 그냥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는 원래 일복이 많고, 남들이 대충 하는 꼴을 못봐서 뭘 해도 결국 끝장을 봐야 하고, 살살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했어. 억울한 마음은 어떻게 하냐고? 아 그건 나이가 드니까 좀 해결이 되던데? 억울한 마음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마. 괜히 그래봐야 나만 힘들더라고. 대신 동네 방네 소문을 내. 내가 이렇게 일을 많이 한다. 내가 이렇게 일을 잘 한다. 팀원에게든 남에게든 동네방네 시끄럽게 웃으며 소문내고 일은 잔뜩 해. 그럼 칭찬이라도 받고, 고맙다고 인사라도 받거든. 칭찬이나 인사를 받아서 어따 쓰냐고?
B양아, 내가 살아보니까 있잖아. 결국 사람들은 다 알더라. 결과는 똑같이 나눠먹는데 나만 애쓴게 억울하다고 했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눈에 보이는 결과를 똑같이 공유한다고 해서 그 과정까지 나눠먹을 수는 없는 법이야. 그 과정에서 니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 너 스스로 알고, 너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알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알아. 내가 너보다 이십 년쯤 더 살아봤으니까, 일단 내 말 믿어봐.
나를 쏙 빼닮은 B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응원해. 울고 싶은 이유가 필요할 땐 언제든 찾아와 오늘처럼. 내가 너에게 잘못 만든 커피가 되어줄게. 자, 오늘은 조금만 울어. 그리고 내일은 다시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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