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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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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공

비밀글입니다.

딸공 2020. 11. 9. 22:13

 

 

프로도양은 삼년 전 나의 반 학생이었다. 뜬금 없이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굴러서 응급실에 데러간 적도 있고, 교실 바닥에서 교복 치마입고 공기하다가 나무 가시가 엉덩이에 박혔다고 울어서 일하던 엄마를 불러 병원에 가게 한 적도 있는 참 사건사고 많은 학생이었다. (참고로 초딩 아니고 무려 고2였다.) 

프로도양은 이과반 학생이었는데 어쩐지 문과감성이 넘친다 했더니 3학년에 진급하며 문과로 전과를 해버렸다. 2학년 중간에 전과하고 싶었는데 담임쌤이 바뀌는 게 싫어서 버텼다는 말도 안되는 소릴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프로도양은 그렇게 항상,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아이였다. 

2018년에 2학년 담임을 하고 2019년 학교를 옮겼다. 고3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꾹 누르고, 초빙의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아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2018년의 아이들에게는 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마음의 빚을 진 느낌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어찌된 노릇인지 매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보고싶다고 한다. 2018년이 최고였다고, 그 때가 너무 그립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 시국, 2020년의 대학 새내기라니, 선배도 선생도 그냥 사람도 다 그리울만한 아이들이다. 대학생활의 1%가 전공, 99%가 사람이라고 믿는 나는, 이 아이들이 너무나도 안쓰럽고 안타깝다. 

 

담임반 아이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떠나보낸 아이들이 작년을 그리워할때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온전히 한해 무사히 키워 보내기만 할 것을, 사뿐사뿐 딪는 법도 좀 가르칠 것을, 너무 온 발이 푹푹 빠지게 해버렸구나, 후회도 많이 했다. 성인이 된 아이들조차도 그때가 너무 그리워서 여전히 떠올리고 추억한다고 말할 때에는 정말이지 잘못하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과거의 따뜻한 기억임을 떠올려 본다.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는 과거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사뿐사뿐 딪는 법을 잘 알지 못해서, 매번 발이 푹푹 빠지는 쪽은 아이들 보다 나니까, 그냥 내 방식대로 흠뻑 예뻐해주기로 했다. 힘들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기억을 재산처럼 쟁여주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프로도양은 아마도 곧 나를 찾아올 것이다. 뜬금 없이 보라색 꽃다발을 들고 와서 닭갈비를 사달라고 조를지도 모른다. 매번 입으로만 다이어트를 하더니 진짜 살이 빠져버렸다는 친구 녀석은 아마 데려오지 않을 거다.

기억 속에 따뜻하게 머물러 주기, 여전히 니가 참 괜찮은 아이라고 말해주기, 위로가 필요해 나를 찾는 것은 언제나 프로도양이지만 더 위로를 받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다. 단, 성인이 되었으니 밥값은 각자내기, 졸업 전에 제대로 세뇌시키길 참 잘했다. 

 

이 아이들이 나를 찾지 않는 날이 오면 완전히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뜻이겠지. 프로도양, 조금은 천천히 어른이 되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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