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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시간, 그들의 시간 본문

딸공

소년의 시간, 그들의 시간

딸공 2025. 4. 28. 22:02



지난 주에 dje메신저로 온 사진이다. 몇개 반을 돌며 학생들이 이 사진을 전자칠판 배경화면으로 깔아두고 갔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도서관 컴퓨터 바탕화면에 고 노무현대통령의 사진을 깔아두고 간 일도 있었다. 이 아이들은 겨우 07, 08, 09년생이다. 그러니 고 노무현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엔 존재하지 않았고, 생을 마감하던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겨우 갓난아기였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대체 뭘 안다고 이렇게까지 고인을 조롱의 소재로 소모하는 건지, 처음엔 기겁을 했다가 나중엔 화가 났지만, 이제는 받아들였다. 아이들에게는 의도라는 게 없었다는 걸. 생각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나의 상상보다 더 생각이란 게 없었던 아이들은, 고인의 존엄성조차 그저 밈으로 소모하는 중이었다. 고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애초에 관심영역이 아니었다. 의도없이 이렇게까지 나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발견할 때마다 마음 한켠이 섬뜩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육도 설득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아이들의 행동에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걸 이해하기로 했다. 사고하지 않고 소모하는 것은 이 세대의 문화였다.

한때, 일베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일베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혐오의 표현은 더욱 은밀해졌고, 익명성과 탈맥락의 세계는 더 깊고 넓게 퍼졌다. 디시인사이드는 이제 아이들의 자유롭고 안전한 놀이터가 되었다. ‘저 일베해요’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하지만, ‘저 디시해요’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부끄러움은 사라졌고, 표현의 자유만 빈 껍데기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옳고 그름은, 적어도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지난 겨울, 서부지법 폭동사건을 통해 세상은 통신비밀보호법조차 필요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통피’와 ‘익명’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이들의 무지는 안타까움을 넘어 슬프다.

지난 주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의 시간을 봤다. 평범한 가정의 막내였던 열세 살 소년이 또래 여자아이를 살해한다. CCTV에 고스란히 담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도, 너무나 말간 눈으로 끝까지 나는 아니라고 한다. 상담 과정에서 벗겨지는 혐오의 정서. 제이미의 이해를 이해하려던 상담자는 마지막 대화를 끝내며 말했다. “가능하면 모든 정신적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시종일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생각했던 제이미는 갑작스런 상담종료 통보에 당황하며 분노하지만, 그 대화를 종료하거나 계속할 권한은 전적으로 상담자의 것이었다.

제이미가 기소된 후 세 가족이 찾은 철물점에서, 또다른 소년은 제이미의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제이미의 무고를 믿는다고. 온라인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을테니 펀딩이라도 해보라고. 온라인에서 생성된 신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고, 완전히 대화가 단절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준 것은 부모였다. 위험한 집 밖으로 나가는 대신, 우당탕탕 시끄럽게 뛰어노는 대신, 안전하고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도록 손쉽게 기기를 건넨 결과는 사고 없는 소비와 혐오를 키웠다. 왜 소녀의 시간이 아니라 소년의 시간인가. 남자아이들을 향한 공감의 부재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만은 아닌가 보다. 주류에서 밀려난 소년들은 억울함을 기저에 깔고 혐오를 키웠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SNS를 팔로우하고 하트를 누르며 성장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오늘 시험 감독을 하고 들어오는데, 청주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뜬 속보는 ‘특수교육대상학생이 흉기를 휘둘렀다’라고 시작했다. 언론은 여전히 범죄 앞에 약자의 범주를 붙인다. 남교사는 교사라 쓰지만 여교사는 여교사라 쓰듯, 범죄 앞에 약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자들의 오래된 관성이다. 진상조사 이전에 새겨진 이 문장은 장애인에 대한 불안과 혐오를 더욱 부추길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 교실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할 말을, 누군가에게는 쉽게 한다. 교실에 깊이 박힌 차별과 배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누구도 자각하지 못하는 채 그대로 문화가 되었다. 아이들은 생각 없이 웃고, 생각 없이 소모하고, 생각 없이 조롱한다. 그러나 그 무심함과 무지가,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가르치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건 정당한 걸까, 비겁한 걸까.
비겁한 교사가 있는 교실에 정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품안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에게는 마음을 쓰지 않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건, 또다른 가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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