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여기까지?
학교를 떠나며 (3) 본문
종업식이 끝난 주말, 짐을 정리하러 학교에 갔다. 근무한 지는 오래됐지만 수학과는 매년 자리를 옮겨다니기 때문에 그래봐야 1년치 짐이고, 매년 필요 없는 건 다 버렸다고 생각해서 박스 하나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체 뭐한다고 짐이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책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전공서는 버리지 못했고, 연구에 필요한 책들과 논문 자료도 한 짐이라 버리지 못했다. 아이들과 나눈 종례신문이나 편지만 해도 한 상자다. 무소유는 글렀고 풀소유만 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풀소유로 학교를 떠난다. 아파트 마당에서 무빙세일이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종업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아이가 이런걸 주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이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받았다. 이런 아날로그 감성이라니. 집에 와서도 한참을,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저 작은 종이 조각을 하나씩 말아 넣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걸 내가 쉽게 열어도 괜찮은 건가 생각하다 열지 못했다.



이틀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열었다. 글씨체만 봐도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있는 내새끼들. 올해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자, 내가 교단에 여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 주었던 아이들이다. 염치 없는 일이지만, 읽는 순간 이미 알았다. 내가 이 글을 또 언젠가는 필요로 할 거라는 걸. 하나씩 다 꺼내 읽고 조심스레 다시 꼭꼭 말아 넣었다. 못견디게 그리운 어느 날이 오면, 교직에 남아야 할 이유를 찾게될 어느 날이 오면, 알약 꺼내 먹듯, 하나씩 꺼내 읽게 될 것이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꼭 오고야 말 미래의 어느 날의 나는, 그럴 것이다.
학원가에서는 지난 여름방학부터 내가 떠난다고 소문이 났다고 한다. 정확히는 내가 휴직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저 휴직해요? 휴직하고 싶네요.. 아이들과 학부모의 질문에 웃으며 받아치던게 8월말 9월 초의 일이다. (몇년 전에도 내가 학교를 옮긴다는 소문이 구체적인 근무지까지 포함해서 돌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마치 예언처럼 결국 떠나게 되었다. 나의 거취를 나보다 먼저 알고 있는 학원가의 소문이란, 불편하며 흥미롭다.
지난 6년의 기억을 무엇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지난 10월의 마음은, 대탈주, 버로우, 기억 삭제 등 온갖 삐딱한 마음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는 나를 바라보던 맑은 눈빛만 남았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내가 이 자리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힘은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기대’ 단지 그거 아니었을까. 나는 수학을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나의 태도만 기억할 것이다.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그때 그 수학 정말 잘 배웠다고 기억하는 아이는 없겠지만, 나의 눈빛과 태도를 기억하는 아이들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교사로 기억될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겨졌을까.
교사라는 자리의 어려움은, 나에 대한 평가가 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데 있다. 먼 훗날 꽤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한 내 새끼들이, 그때 그 선생님 꽤 괜찮았지 라고 상상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그냥 잘 기억이 안 나준다면 적당히 감사할 것이고, 돌이켜보니 최악이라고 생각한다면 많이 미안할 것이다. 나는 동신과학고를 떠나고, 나의 지난 6년의 평가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헤어짐의 순간 평가가 시작되는 인연이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가 정말, 두렵다.
'딸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종례신문 (0) | 2025.03.16 |
---|---|
엽떡 먹고 싶은데요. (0) | 2025.03.09 |
학교를 떠나며(2) (0) | 2024.12.29 |
학교를 떠나며 (1) (0) | 2024.11.23 |
안녕, 잘 있었니, 나, 다시 왔어. (0) | 2021.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