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여기까지?
학교를 떠나며(2) 본문
이 글은 동신과학고 근무를 마치며 남겨두는 기록이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2023년은 꽤 괜찮은 해였다. 8기들과 3학년 수업을 하며,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고 가르쳐주는 만큼 흡수하는 아이들을 보며 보람도 있었다. 고3이 되니 어린아이 티도 제법 벗고, 이렇게 어른이 되는구나, 그 시간을 함께했구나, 그런 뿌듯함도 있었다. 2023년의 끝에, 이 정도 아이들이라면 학년부장을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8기들을 3년 동안 가르쳤지만 업무를 맡느라 학년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 중 나를 ‘우리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이가 없었고, 그게 한편으로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 학교에서 나를 ‘우리쌤‘이라 불러주는 아이들이 있으면 좋겠다, 1학년부터 잘 키워서 정말 멋지게 졸업시켜 보고 싶다, 그런 욕심이 생겼다. 2024년, 11기의 입학을 앞두고 학년부장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학교 근무 6년차였지만 특목고는 2년 유예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11기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함께하리라, 코로나때 못 해본 거, 학년부 아니라서 못 해본 거, 11기들에게만큼은 진짜 아쉬움 하나 없이 다 해주리라 마음 먹었다.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고 학술제로 학교에 방문한 11기를 만나며 속으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가 니네 잘 키워볼거야, 입이 간질간질한 걸 꾹 참고 돌려보냈다. 3월에 만나자, 우리 진짜 최고의 학년이 될거야,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1학기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잘한 일들이 있었지만, 으레 있을법한 별 것 아닌 일들이었다. 소소한 다툼과 자잘한 잘못들은 혼나고 다시 안 하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었다. 선배들에게는 하지 않던 개인패드 사용 제한을 걸었고, 자율학습 감독을 엄격하게 한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 주로 큰 학교에서 근무하던 분들이 1학년부 담임으로 들어오면서 동신과학고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좀 더 관리해보자는 합의가 있었는데, 쉽지 않았다. 개인 패드 사용 제한에 대해서는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가장 쉬운 것을 굳이 일을 만들었다 싶었지만, 그냥 밀어붙였다. 그래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모르던 그 공간에 불만글이 쌓이고 있었고,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반발심이 커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 꾸역꾸역 1학기가 지났다.
9월 되었다. 2024년 9월은, 내가 교직에서 겪은 모든 시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1학기 말 합숙 출장을 보내달라고 조르면서 2학기엔 더 일을 많이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때문이었을까. 9월에 생각지도 않던 입학지원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미 몇년이나 했던 일이라 올해는 정말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입학지원부 일을 하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양의 범위를 벗어나고 말았다.
더구나 이번 학기는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으로 학년 수학과 일을 혼자 다 커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교육과정이 바뀐 첫 해라 1학년에 심화수학이 들어온 것도 5년 만의 일인데, 모든 걸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기댈 사람이 없었다. 진도 계획부터 평가설계까지 다 내 몫이었다. 하필 남편은 격주로 해외 출장이 있었고, 둘째네는 학교 공사로 9월 말까지 개학을 하지 않아 매일 점심밥까지 챙겨야 했다. 이 기간에 평가 계획이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수행평가 공지가 나갔고, 중간고사 출제, 검토를 했다. 국외체험을 위한 안전교육, 컨설팅, 교육청 허가도 있었고, 학위 과정 QE까지 있었다. 그 와중에 입학지원부 일이라니. 결국 9월의 거의 모든 날을, 지킴이 선생님이 그만 나가달라 할 때까지 일을 했다. 주말은 물론 추석 연휴까지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내내 일을 했지만 감당하지 못해서 국외체험학습을 떠나기 전날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내 수업의 모든 연습문제는 항상 해설 강의를 찍어 영상으로 제공했었는데, 이번 학기 처음으로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9월의 한복판에 그 일이 터졌다. 수백 페이지의 글을 캡쳐하고 저장했다 지웠다. 이제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 그 일을 겪으며, 툭 하고 애써 잡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수업을 들어가도 나에 대해 평가하던 불만글과 댓글이 떠올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가장 대하기 어려웠던 어느 반에서는 6년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실수를 두 번 연달아 했다. 문제를 잘못 설명하고, 정정했다. 개학 전 급하게 만들었던 학습지엔 오타가 유난히 많았는데, 수업 전 오타를 정정하는 것조차 이 반에서는 너무 아팠다. 악순환이었다.
입학지원부 업무가 끝나자마자 국외현장체험학습이 있었다. 그마나 잠깐의 여유였을까, 사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그래도 맑은 하늘 아래 웃는 11기는 너무 예뻤다. 어쩌면 다시 잘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희망도 가졌던 것 같다. 호텔 방에서 매일 밤 11기의 사진을 정리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래, 이렇게 예쁘게 웃는 아이들인데 내가 왜 어두운 것만 보고 있었을까, 기대도 했었다. 착각이었다.
국외체험학습이 끝나고 본격적인 수행평가, 대회의 시즌이 되면서 내가 가진 잠깐의 기대는 보란 듯이 무너졌다. 단계별로 진행되는 수행평가 마감일마다 카톡으로 전화로 끝없는 항의가 이어졌다.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의제기로 끝나는 대화는 학생과 학부모 가리지 않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밤낮 없이 계속되었다. 수업시간이 아닌 때 마감을 했던게 잘못이었다. 수행평가를 수업 중에 마감했을 때 먼저 한 반이 불리하다는 의견이 많아 그렇게 해왔던 건데 나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교사가 되었다. 9월의 미친 시기에 혼자 만들어낸 평가계획에는 헛점이 많았다. 반복되는 민원에 관리자 앞에 불려간 게 몇번인지, 이제는 죄송하다는 말조차 민망할 지경이었다. 학생들에게 사과를 얼마나 했던지, 학생과 교사간의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진 것 같았다. 교내 대회 공지를 반별로 다르게 했다는 항의도 들어왔다. 수학교사 셋이 함께 공지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나 말고는 수업 중에 공지를 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홈페이지와 교내 게시판에 대회 공지가 게시되어 있었지만 아이들은 구두 공지를 받은 반과 아닌 반이 어찌 같을 수 있냐며 따졌다. 외롭고 웃긴 마음으로, 또 사과를 했다. 겨우 움켜쥐고 있던 마지막 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어디에 연결된 끈이었을까,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어리석은 마음이었다. 8기를 보며, 3년을 부대끼며 만든 관계 속에서 가진 감정을 그대로 11기에게 대입하려 했었다. 학년부장은 그냥 애들을 마냥 예뻐하면 되는 줄 알았다. 16명 담임하던 마음으로 80명의 담임이 되면 되는 줄 알았다. 내 마음은 아이들이 마냥 예쁘고 안쓰럽던 담임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은 어렵고 두려운 학년부장, 딱 거기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섭고 어려운 교사였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함부로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바랐다. 큰소리로 욕하는게 싫었고, 쉬는 시간마다 인스타에 게임에 빠져있는게 싫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쳤고, 내가 잡으면 잡힐 거라 생각했다. 큰 소리로 욕하는 아이들을 큰 소리로 혼냈고, 약한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아이는 더 엄하게 대했다. 하지만 충분히 친해지기도 전에 혼난 경험부터 쌓인 아이들은 당연히 나를 싫어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전해들은 학부모들도 ‘우리 아이는 혼내지 마세요.’, ‘아이가 선생님을 너무 무서워하네요.’ 라고 연락하기 시작했다. 특정 아이만 안 혼 낼 수는 없는 법, 그냥 나는 누구의 잘못도 지적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시험을 칠 때마다 낮은 성적에 우는 아이들을 보며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고, 힘들어도 포기만 하지 않고 버티면 잘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설픈 나의 위로는 아이들에게 닿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를 보는 거리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데, 나 혼자만 발을 맞춰 걷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온도를 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잠을 잘 수도 없고, 학생들 앞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시간을 지나며 에듀힐링센터에 상담 신청을 했다. 교실에서의 사소한 대화에도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초 면담 후 본 면담에 진입하기 앞서 상담을 취소해버렸다. 내가 상담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즈음 경찰 조사 결과서가 ‘각하’처분으로 도착했다. 나는 등기우편으로 온 결과지를 파쇄하고 그냥 마음을 닫기로 했다.
유예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이 아이들을 최고로 키울 수 있다는 착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만하면 충분히 깨달았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이 아이들을 정말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 최고의 경험으로 최고의 학년을 만들어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것, 그 마음은 단지 오만함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몇 학교에서 초빙 제안이 들어왔지만 받지 않았다. 초빙 교원으로 다시 일할만큼의 열정이 남아 있다면 11기 옆에 남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어디든 발령이 나는 대로 갈 것이고, 어떤 일이든 그냥 할 것이다. 다음 학교는 큰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작은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중학교가 될 수도 있지만 어디든 상관 없다. 나의 노력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는 것, 그래서 더는 상처받지 않는 것, 이제 내가 바라는 건 그것 뿐이다.
매번 같은 다짐을 하고 매번 같은 실패를 한다. 쓸데없이 온 마음으로 진심을 다했던 탓에, 올해의 실패는 유난히 더 아팠다. 이제 동신과학고를 떠난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남은 일을 하러 학교에 왔다가 운동장에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언젠가는 오늘이 못견디게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그때 나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까,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할까. 이제 나는 어떤 교사로 살아야 할까. 교사로 계속 살아가는게 옳을까.
어떤 고민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분명한 건 나와 우리의 시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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