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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공

그녀에 대하여

딸공 2020. 10. 15. 23:20

 

둘째를 키우며 공동육아라는 것을 시작했다. 육아에 마땅한 철학이랄 것은 없었지만 큰 아이의 성장을 겪으며 인지교육을 서두르고 싶지 않다, 자연을 좀 느끼면서 컸으면 좋겠다, 정도의 막연한 가치관이 자리 잡던 차였다. 그러니 내가 공동육아를 택한 것은 온전히 아이를 위한 이유였다. 하지만 4세부터 7세까지 4년, 이후 공육방과후까지 총 5년 반의 시간이 남긴 것은 아이들만큼이나 촘촘하게 얽힌 부모들의 공동체였다.

그녀를 만난 것도 공동육아 부모모임이었다. 길가의 풀잎에도 낯을 가리던 나의 둘째와는 달리 야무지고 붙임성이 좋아 단연 눈에 띄던 아이, 그녀는 그 아이의 엄마였다. 아이를 키우며 만난 인연의 이름은 누구 엄마로 고정되게 마련이어서 우리는 서로를 쉽게 oo엄마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OO엄마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명 중의 하나였다.

첫 모임에서 메이저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소개를 들으며 잠시 끄덕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부모들의 직업은 충분히 다양하고 다들 화려했으니까. 그녀에게는 직업을 넘어서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그녀의 생기부를 쓴다면 아마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

‘항상 밝게 웃으며 편견없는 태도로 사람을 대함.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임하며 타인을 설득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있음. 명랑하고 자신감 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태도로 뛰어난 의사소통 능력을 보임. 진심어린 태도와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주변까지 따뜻하게 밝히는 매력이 있음.’

그녀의 딸과 나의 둘째는 한 해를 제외하고 번번이 다른 방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옆방 엄마로 서로를 바라볼 뿐 나란히 앉아 대화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아는 그녀의 모습은 철저히 나의 프레임에서 관찰한 모습일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밝고, 가끔은 좀 시끄럽고,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직함이 휴직 승무원에서 퇴직 승무원으로 바뀌던 날, 누구보다 밝게 웃는 그녀가 나 혼자 참 아까웠던 이유다.

지난 3월, 승무원이 되고 싶은데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졸업생 아이를 다독이다 말고, 무작정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백하자면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이유 없이 그녀라면 따뜻하게 응원을 해줄 것 같았다. 평소에 안부전화 한통 하던 사이가 아니면서 그냥 그래줄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와 통화를 끝내며 그녀는 경력직 승무원으로 재취업을 준비중이라 했다. 화상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말에 당연히 곧 다시 일하겠구나,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요즘 브런치에 글을 쓴다.

재취업을 준비하고 실패하며, ‘내가 이렇게 애매한 사람이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애매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못견디게 아팠다.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고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늘 자신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참 애매한 사람임을 깨닫는 일, 지난 몇년간 내가 수 없이 반복해온 일이다.

‘어쩌다보니 교사’가 되었다는 애매한 말 한마디로, 나를 설명하기 보다 회피하며 산다. 전공 앞에서 나는 참 애매한 사람이었다. 어릴적부터 교사가 꿈이었다는 동료들을 보며, 얻어 걸려 교사가 된 나는 또 주눅이 든다. 교사로서 나는 참 애매한 사람이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며 아이의 공부는 놓지 못한다. 육아 앞에서도 나는 참 애매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재능있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재치있는, 등의 각종 관형사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주인들이 늘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경력 10년 중의 2년 육아휴직, 두 아이의 엄마지만 수업은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그런 복잡한 스탠스의 나는 늘 애매한 사람이었고, 그 사실에 늘 기가 죽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뛰어나고, 재능있고, 아이디어가 넘치고, 재치있는 사람들 틈에서 애매하게 제 자리를 지켜온 나 같은 사람들이, 실은 세상을 받치고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애 엄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내 일에 누구보다 진심이며, 성과는 없어도 늘 노력중인 나 같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 수능 시즌에 첩보영화처럼 사라지는 동료 교사들의 수업을 보강해주며, 강연 스케줄이 연말까지 잡혀있다는 페친들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전국대회에서 최고등급을 받았다는 선생님에게 떡을 얻어 먹으며, 특별할 거 없지만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수업을 해내고 정성들여 밥을 짓고 있는 애매하기 그지 없는 나같은 사람.

애매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는가. 그녀의 브런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해 본다.

OOO작가님, 내가 아는 애매한 사람들 중에 작가님이 제일 빛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애매한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멀쩡히 굴러가는 건데. 좀 애매한게 뭐 어때서요. 애매하고 당당하게 살아요 우리. 아니면 애매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어볼까요? 지금도 이미 충분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그렇게 글을 쓰고 털어버렸을 것이다. 자꾸 깨지는 거 쉽지 않다고 썼지만 그렇게 쓰고 분명 잊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또 무언가를 찾아 몰입하고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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