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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먹어보고서 - 컵누들 잔치국수 편 본문

딸공

먹어보고서 - 컵누들 잔치국수 편

딸공 2020. 9. 18. 00:20

드라마에 등장하는 흔한 음식 중, 내가 절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양푼 가득 비빈 나물 비빔밥과 잔치국수가 그렇다. 양푼 가득 나물을 비비는 장면이 등장하는 건 둘 중의 하나다. 뭔가 잔뜩 열이 받았거나, 남자 앞에서 깨작이느라 밥을 제대로 못 먹었거나. 일반적으로 이걸 퍼먹는 주체는, 여자다. 나는 이 설정 자체도 맘에 안 들지만, 양푼 가득 담은 비빔밥이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못마땅하다. 아니, 나물이란 음식이 그렇게 냉장고만 열면 대충 있는 거였어? 삶고, 데치고, 무치고, 조물락 조물락 노동은 다 어디로 가고, 열 받은 주인공네 냉장고엔 늘 삼색 나물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단 말인가. 아니 백번 양보해서 다 갖췄다 하더라도 그걸 다 때려 넣고도 부족해 고추장에 나물의 정체성을 파뭍어 버리는 설정이라니, 맹세코 동의해주기 어렵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향수와 공감을 자극하는 역할로 소모되기에 나물 비빔밥은, 너무나도 수고로운 음식이다. 하지만 이 나물 비빔밥도 잔치국수와 비교하면 양반이다. 대체 어디서 유래한 음식이기에 국수 앞에 잔치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름이 되었을까. 국어사전부터 찾아보자.

잔치국수 [명사] 맑은장국에 국수를 말고 갖은 고명을 얹은 음식. 주로 혼인이나 회갑연 같은 잔칫날에 맛볼 수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잔치국수는 말 그대로 잔칫날 먹던 특별식이었다. 그것도 혼인, 회갑연과 같은 일생일대의 경삿날 나누는 귀한 음식. 이 잔치국수가 드라마에 등장할 때 ‘출출한데 간단히 국수나 해 먹을까?’와 같은 어이없는 대사가 동반된다는 사실은 작가들의 자질을 의심해봐야 하는 대목이다. 간단히 해 먹자는 국수의 레시피를 한번 들여다보자.

간단히 계란을 깨뜨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다.

간단히 흰자와 노른자의 지단을 각각 부친다.

간단히 흰자와 노른자의 지단을 채썬다.

간단히 당근, 애호박, 양파 등을 손질한다.

간단히 당근, 애호박, 양파 등을 채썬다.

간단히 당근, 애호박, 양파 등을 볶는다.

간단히 고기를 다지고, 간단히 소금 후추를 뿌려, 간단히 볶는다.

, 모든 과정이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육수를 불에 올려두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육수는 간단히 북어 대가리, 파 뿌리, 무, 다시마 등을 넣는다. 

여기까지 읽고 간단하네? 하면 곤란하다. 아직 면을 안 삶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다시 큰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끓인다. 국수 면은 소면이 일반적이지만 진짜 고수들은 중면을 선호한다. 뜨거운 국물에 소면은 쉽게 퍼지기 때문인데, 소면이든 중면이든 오뚜기 옛날국수가 국룰이다. 끓는 물에 면을 한 바퀴 돌려 넓게 펼쳐주고, 넘칠 것 같은 타이밍에 정확히 찬물을 투척해가며 밀당을 세 번 해준다. 그럼 끝인가? 노! 아직도 안 끝났다. 삶은 국수를 건져 찬물에 빨아준다. 어차피 뜨거운 국물에 먹을 텐데 뭐하러 헹구나 생각한다면 요알못. 백종원 아저씨의 설명에 의하면 국수 표면에 붙은 글루텐을 없애야 한단다. 뭔 소린지 이해할 필요까진 없고 빨래 빨듯 헹구면 족하다. 자, 이제 그릇에 담기.............전에 다시 끓는 육수에 토렴을 한다. 와! 간단하다.

이렇게 담아낸 음식이 잔치국수다. 그러니 잔치국수라는 것은, 육수를 끓이고, 고명을 준비하고 면을 삶아 담아내는 과정까지, 온통 수고로움의 결정체다. 간단히 국수나 한 그릇 먹자는 사람들에게, ‘쳐먹는 니년이나 간단하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유다.


저녁 시간 내내 바빠 밥을 못 먹었다. 연구실 구석에 쌓여있던 120kcal 컵누들과 280kcal 불닭볶음면을 모니터 뒤 빈 공간에 쌓아두고 일을 하며 생각했다. 쫌만 기다려라, 언니가 다 먹어줄게! 둘 중에 뭘 먹을까, 철없는 고민은 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바른 식습관을 익혀 온 나는, 편식 없이 둘 다 먹을 예정이다.

먹기 전에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음식의 이름은 <컵누들 잔치국수 맛>이 아니라 <컵누들 잔치국수>다. 그러니까 맛만 잔치국수처럼 낸 게 아니라 잔치국수가 정체성 그 자체인 음식이다. 이름 옆에 붙은 ‘끓는 물 2분’이 자꾸만 눈에 걸린다. 수고로운 잔치국수를 2분 만에 먹다니 어쩐지 반칙을 하는 기분이다. 물을 붓고 기다리는 2분 동안 정성 들여 젓가락을 쪼개며 약간의 죄책감을 덜어본다. 아싸!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엄지와 새끼 사이에 젓가락을 말아쥐고 국물부터 들이킨다.

오늘은 바쁜 날이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자소서를 제출했고, 다음 주엔 원격수업이 결정되었는데 오후 내내 5시간 연달아 수업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채로 다섯 시간을 떠들었고, 자소서를 읽고, 추천서를 썼지만, 지난주에 받은 아이의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교과서 신청 파일은 우리 반만 늦게 냈다. 원격수업 촬영은 시작도 못했다.

오늘은 또, 슬픈 날이었다. 점심시간 후 세 시간 연강에 아이들은 졸고 있었고, 달래다가 웃겨보다가 어려운 문제도 던져 보다가, 차라리 한숨 잘래? 해도 반응이 없었다. 졸업이 확정된 아이들은 자소서로 바빴고, 진급이 확정된 아이들은 부러워하느라 바빴다. 아이들이 떠나간 빈 교실에는 무기력한 한숨만 가득했다. 아무도 지우지 않고 떠나버린 판서와, 책상에 가득 쌓인 지우개 가루를 치우며, 괜히 심술이 나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멸치 향이 진한 국물을 마시는 동안 면발이 적당히 퍼진다. 쫄깃쫄깃보다 유들유들에 가까운 면발이 고맙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특별히 바쁜 날은 아니던 것 같기도 하다. 연달아 있어 힘들긴 했어도, 다섯 시간은 종종 있는 일이니까. 제출 제일 늦긴 했어도, 기한을 넘긴 건 아니니까. 아이의 질문이 떠올라 바로 답을 써줬고, 다음 주는 원격이니까 오늘이라도 떠오른 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젓갈, 두 젓갈, 먹을 때마다 면발은 조금씩 더 퍼지고, 더 부드러워진다.

생각해 보면 또, 그렇게까지 슬픈 날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늘 오후에 졸려 하고, 격주 등교로 요즘은 더 힘들어했다. 몇몇이 뒤늦게 들어와 칠판을 지우겠다고도 했다. 이미 내가 지워버린 뒤였지만, 지우개 가루도 쓸어 담고 갔다.

호호 불어가며 국수를 먹는데, 어쩐지 마음이 좀 풀린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뤘던 자소서를 다 수정해줬고, 추천서 틀도 대충 잡았다. 수업 촬영은 시작도 못했지만, 계획을 다 세웠다. 주말에 촬영하고 편집하면 되니까, 괜찮다. 그러니까 오늘은 특별히 엄청나게 바쁘고 슬픈 날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한 젓갈을 먹고 국물까지 싹싹 비운다. 뜨끈한 국물에 괜히 푸근한 마음이 어울린다. 어쩐지 특별식을 먹은 것만 같다. 잔치국수맛, 아니고 잔치국수 맞네.

어쩌면 잔칫날 국수를 나눠 먹은 게 레시피의 수고로움이나 음식의 화려함 때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세심한 고명을 생략해도 뜨끈한 국물에 마음을 녹여내는 맛, 그거면 족할지도 모르겠다. 이 맛에 익숙해지면, 간단히 국수나 한 그릇을 먹자는 말에 어쩐지 심술이 덜 날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사실, 꽤 괜찮은 날이었던 것 같다. 금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이라는 게 여전히 좀 문제지만.



 

※ 퇴근길에 ‘이거 가져가서 먹어도 돼요?’ 묻는 나에게 Y부장님께서 ‘당연하지! 다 가져가도 돼! 먹어보고 맛이 어땠는지 알려줘!’ 하셨다. 그러니까 이 글은 아낌없이 다 퍼주시는 Y부장님께 바치는 헌정 보고서다. 내돈내산 후기는 아니지만, 광고도 역시 아니다. Y부장님, 사랑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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