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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여기까지?

장기재직휴가, DAY4 본문

여행

장기재직휴가, DAY4

딸공 2026. 9. 17. 20:48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써야한다는 의무감에 자꾸 조급해지는 아침이었다. 대구에 가기전에 성심당을 찍을까, 평일 오전 성심당을 가보고 싶은데 하지만 조금 귀찮다, 생각하며 시동을 거는데 모찌님 디스플레이가 먹통이다. 터치도 안먹고 충전 완료상태 그대로 멈춰버린 화면. 몇달 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후에도 충전 오류가 난 적이 있었는데, 엊그제 떴던 업데이트 알람이 어제는 안 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집 바로 앞 충전기에서 충전을 꽂았더니 와이파이가 잡히면서 버전업이 된 것 같았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후 첫 충전에서 계속 오류가 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시동을 껐다 켜봐도 해결이 안 돼서 출발 전 성심당 대신 서비스센터를 찍기로 한다. (미니 서비스센터가 집앞에 있어서 넘 다행이다ㅠ)


하지만. 간단히 디스플레이만 리셋해주시면 돼요, 라는 나의 요청에 점검을 해야하니 차를 맡기고 가라는 직원. 아니 제가 지금 당장 대구를 가야한다고요, 이거 리셋만 해주시면 되는데요,, 이런 증상은 처음이라 점검이 필요하다는 직원과 기다릴 수 없다는 나. 타협없는 대화가 몇차례 오간 뒤, 아니 내가 바쁘다고요 차를 맡기고 갈 수 없는데 두고 가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그냥 리셋만 해주세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3분이면 되는 걸 왜 차를 두고 가라는 거야..

그 와중에 오류난 상황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있어 개인정보가 있으니 지워 달라고 했는데 개인정보는 촬영한 적 없다는 직원님. 아니 프로필에 제 이름이 있고, 네비게이션 실행할 때 저희 집주소도 떠 있었는데요? 촬영한 화면을 다시 돌려보고서야 그러네요 하고 삭제하는 직원.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지금 이러는 동안 소중한 제 휴가가 32분이나 지나갔다는 걸 알고 계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그분 잘못은 아니니까, 차를 끌고 나온다. (디스플레이 리셋 방법을 봐뒀으니 앞으론 내가 해야겠다)

성심당까지 갈 의지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 오랜만에 그린베이커리라도 찍고 가야겠다. 몇년 전까진 그냥 동네 빵집이었는데 그놈의 빵지순례가 유행하면서 웨이팅 빵집이 되어버린 그린베이커리를 평일 아침에 갈 수 있다면 좀전의 짜증 정도는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쏙쏙이 먹고 싶다) 미니 서비스센터에서 300m도 채 안 되는 거리의 그린베이커리에 가서, 길에 대충 주차를 할까 하다가 (오늘따라 굳이)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튜닝샵과 한 건물에 있어 일반 주차는 4층 이상부터 가능. 빙글빙글 돌아서 4층에 (굳이) 주차하고 신나게 뛰어 내려와 1층 그린베이커리 문을 딱 여는데 뭔가 느낌이 쎄하다. 여기 왜이렇게 사람이 없죠? 네 10시 오픈이라고 합니다 (9:42 도착..) 하하하 어쩐지 주차장이 텅텅 비었더라고요! 18분을 더 허비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출발하는 쪽을 택한다 (쏙쏙이 먹고 싶다!! ㅠ)

즐겨찾기 플리를 랜덤 재생으로 걸어두고, 시속 109로 드라이빙 어시스턴트를 세팅한 뒤 2차로에 안착한다. 날씨가 너무 좋다. 투썸 기프티콘이 이번주까지던데 숏라떼에 아박을 먹을까, 병원 옆에 새로 생긴 빵집이 알고리즘에 뜨던데 거길 가볼까, 대전에 있는 집들은 어떻게든 또 갈테니 대구에 가서 맛집이나 찾아야겠다, 그런데 차가 엄청 막히네, 평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공사 정체가 많다는 건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거야.. 열일하는 도로공사 덕분에 북대구 IC를 통과한 시각은 이미 12:03이었다. 배고파 투썸이라도 갈래, 골목길에 살짝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빵빵대는 뒷차. 아니 이 정도면 소가 백마리도 지나가겠구만 뭘 차를 빼래,, 아 근데 귀찮다 투썸 안갈래 다시 차를 빼서 출발. 파티마병원 400미터 전 신호대기 중에 알고리즘에서 본 빵집 발견, 아하 오늘 아침의 모든 시련은 저 빵집을 가라는 계시구나 저 좀 내릴게요. 골목길에 주차하고 보행신호가 바뀌기 직전에 뛰어서 길을 딱 건넜는데 하하하.. 월화수 쉬고 목금토일만 영업한다는 빵집이 평일 낮 12시에 솔드아웃을 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장사 의지가 있다면 빵을 더 구우셔야죠,(는 내생각이고 남들은 보통 오픈런을 도전하겠지)

깔끔하게 포기하고 병원 1층 스벅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병실로 간다. 그 와중에 크랜베리치킨샌드위치 품절. 아니 진짜 저한테 왜이러시는 거예요 전 이것만 먹는다고요, 는 물론 개소리고 바질치킨토마토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최애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먹진 않습니다)

누군가 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아빠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어제 읽다 던져둔 책을 뒤적이는데 갑자기 옆이 소란하다. ’갑자기‘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게 정말로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옆 베드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임종실에 갈 새도 없이, 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채 정말로 갑자기, 그냥 갑자기. 호스피스는 이런 곳이군요.. (지장보살)

심란하고 서럽다. 근데 졸리다. (심란하고 서러운데 졸린게 가능하더라) 침대에 기대 까무룩 졸다 일어났더니 오후 3시.. 이러다 오늘이 그냥 가버리겠네 쫀득모찌빵이나 사러 갈까 어차피 아빠는 잠만 자는데, 까지 생각한 다음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검색부터 해본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오늘 안 사실: 모찌빵집은 목요일에 쉽니다)

가족실에 있어 자꾸 보고 되는데 묘하게 안심이 된다. (물론 종교는 없습니다)

병실을 돌던 수녀님이 ‘울었어요?’하고 물었다. 아뇨. 저 자다 일어났는데요. 정말로 울어버리기 전에 신발을 신고 나가야겠다. 기분이 우울할 땐 신발부터 신어야 하는 법이다. 근데 어디가지? 갑자기 비어버린 옆베드에 새로운 환자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들어오는 걸 보니 빵 생각은 싹 사라졌다. 그냥, 걸어야겠다.

목적을 가지고 걸었는지 걷다보니 그곳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운동화를 갈아신고, 운동모드를 켜고, 그냥 걸었는데, 한번은 가봐야겠다 생각했던 곳에 와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낡아버린 오랜 기억 속 동네와 나.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마치 숙제처럼 도착한 동네를 크게 두 바퀴 돌면서 원래 이렇게 작은 동네였나 생각한다. 아니 대체 어떻게? 왜 아직도? 혹시 저 보라고 일부러 마련한 세트장인가요? 추억보단 신기함에 가까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오늘 아침 반복된 지독하고 사소한 불운은 오후의 이 숙제를 완료하기 위한 밑작업이었나요.

이곳은 내가 갓난아기때부터 초6까지 살던 집
2020년쯤 그린 내 기억 속의 그 집
담장 넘어 얼핏 보이는 마당의 모과나무도 그대로였다.

삼양 슈퍼가 아직 있다니 (영업은 안 하는 것 같았지만) 90년 언저리 그시절, 여름이면 저 슈퍼 앞 평상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수다를 떨거나 콩나물을 다듬거나 티비를 보는 그야말로 핫플이었다.
심지어 아직 영업중이었어 우주문구!!!
심지어 아직 영업중이었어 대구통닭!! (프랜차이즈 치킨이 나오기 전,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치킨은 대구통닭뿐이었다. 운동회날은 예약까지 해야했던 원조 웨이팅 맛집)
어릴적 다니던 미도피아노. 간판은 없는데 문에 그림이 남아있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든 세트장인거죠.
미도피아노 다음으로 친구를 따라 다녔던 계명피아노. 저 옆집이 새로미 주산암산학원이었는데 다행히(?) 그건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수학이란 걸 처음 배웠던 곳인데 말이죠.
그리고 아양초등학교. (물론 난 국민학교를 다님..) 라떼는 육교 내려와서 언덕길을 다시 올라갔는데 육교와 학교가 구름다리로 연결되다니 세상 좋아졌다.
여전히 태권도부가 잘나가는 듯. (매년 남자짝꿍이 태권도부였고 아주 죽어라 싸웠던 기억..)
라떼 다니던 학교 정문. 저 언덕길 참 쉽지 않았다.
이 학교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요.
맥락없이 타로샵. 오늘의 세팅이 정말 날위한 쇼인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는 물론 헛소리고 남이 봐주는 타로가 궁금했기 때문. 하지만 만원을 받고 그 카드를 그렇게 밖에 설명해주지 않는다고요? 재구매는 없을 예정입니다. (은퇴 후 밥벌이 옵션이 +1 되었습니다)


병원에 돌아오니 6.5km, 딱 좋은 산책이었다. 좋은 카드만 골라 읽어준 타로 리딩마저 누군가 날위해 준비해둔 세팅의 일부였던 것처럼, 서러운 마음이 싹 사라졌다. 걷길 잘했다.

지난 10여년 간 점심시간마다 꼭 아빠와 통화를 했다. 급식실을 나서며 나는 늘 습관처럼,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용건은 없었다. 별일 없냐 밥은 먹었냐는 싱거운 대화의 끝에 아빠는 늘, 즐거운 오후를 보내라고 했고, 재미있는 생활을 하라고 했다. 즐겁고 재미있는 삶을, 숙제처럼 던졌다.

밤 10시, 아무리 기다려도 깨지 않는 아빠에게 들리지 않을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서다 생각하니 오늘 먹은게 샌드위치뿐이네. 그래서 마무리는 혼술. 휴가 4일차 밤의 얼맥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마무리가 어딨을까.


매일 새로운 미션을 받는 사람처럼 쫒기듯 닷새의 휴가를 채운다. 아빠의 시간은 오늘도 오랜 기억 속 그 골목만큼이나 느리게 흐르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오늘치의 기쁨을 찾아가며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더 흘러 아빠가 떠난 뒤에도 그럴 것이다. 이십년 전의 내가 하지 못한 내 몫만큼의 이별을, 나는 해낼 것이다.

나의 휴가는 이제, 하루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