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Archives
Recent Comments
«   2026/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oday
Total
관리 메뉴

... 어쩌다 여기까지?

장기재직휴가, DAY2 본문

여행

장기재직휴가, DAY2

딸공 2026. 9. 15. 20:12

간병사들이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길래 무슨 일 있냐 물었더니 옆방 환자분이 목욕을 한다고 한다. 저희 아빠도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올 때부터 목욕을 원했지만 '컨디션 좋으면' 시켜준다던 목욕은 여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호스피스 병동이란 곳 특성상,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놈의 컨디션 값이라는 것은 단조감소하는 것이 자명한 패턴이니까, 결국 입원날 하지 못하면 영영 목욕은 못하는 거구나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럼 어르신 컨디션 한번 볼까요? 간병사 셋이 붙어 방수 드레싱을 해두고 간호사의 컨디션 체크를 기다린다. 혈압, 체온, 산소포화도가 모두 정상 범위내로 들어와야 가능하다는, 거의 목욕 고시 수준이다. 어? 괜찮네요, 목욕 하셔도 되겠어요! 간호사의 한 마디에 간병사들이 박수를 치며 침대를 옮긴다. 입원 3개월만에 첫 목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보호자가 옆에 붙어 끈질기게 요구하니 해주긴 하는구나, 이걸로 나의 휴가는 이미 보람이 넘쳤다.

목욕을 하고 손톱까지 깎고 나니 점심이 훌쩍 지난 시각, 오늘치 햇볕과 약간(?)의 당을 충전하기 위해 병원 밖으로 나온다. 오늘자 점심메뉴는, 윤옥연할매 떡볶이. 대구에 올때마다 배달로 자주 먹는 맛이지만 본점은 또 오랜만이니까. 굳이 굳이 본점으로 간다.  


뭐야, 이동네 왜이렇게 번화했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본점의 모습과 너무 달라진 동네 모습에 네비가 딴데를 찍었나? 가게가 이사를 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하긴,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시간이다..  그래도 가격은 여전하네.

다대기라고 불리는 양념을 그릇 가장자리에 스윽 하고 덧발라 오는 건, 내가 윤떡 좀 먹어 본 사람입니다 하는 암묵적 표식이다.

떡볶이 2천원, 튀오뎅 천원, 삶은 계란 500원, 3500원이면 충분한 식사에 굳이 3천원짜리 김밥을 추가한다. (윤떡에서는 튀오뎅과 튀만두, 삶은 계란을 넣어 먹는 4500원 조합이 정배지만 오늘은 그냥 김밥이 먹고 싶었다.)

경험하지 못한 감각은 절대 공유할 수 없는 법이라는 걸 주장할 때 윤옥연할매 떡볶이보다 더 좋은 예시는 없을 것이다. 기교라곤 1도 없는 맛.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맛. 단맛도 감칠맛도 전혀 없는 맵다 못해 씁쓸한 국물은 완벽한 추억의 맛이지만, 나에게도 매번 첫입은 다시 낯설다. (하지만 난 이 맛을 너무 좋아하지)  

김밥 세조각과 떡볶이 두 줄을 남긴 것은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후식을 위한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기교라곤 1도 없는 떡볶이집 바로 옆에 세상 모든 기교를 집대성해서 도넛 하나에 다 넣어버린 것 같은 노티드가 입점해있다니 장사 천재들인가.

겉쫀속쫀의 정석 노티드에서 오늘 나의 픽은 말차 도넛. 근데 여기 커피가 원래 이렇게 맛있었나? 아메리카노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먹었으니 아주 조금 걸어보기로 한다. 

평일 오후 2시의 햇살을 받으며 걷다 보니 상황과 맥락을 다 내려놓고 그냥 행복했다. 그래 뭐 별거 있냐, 맛있는 거 먹고 햇살 받으며 걸을 수 있으면 행복이지, 그른갑다 하면 행복이지. 

병원에서는 반전의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늘은 딱 좋았던 시간까지만 기록해두기로 하자. 더없이 좋은 9월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