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Archives
Recent Comments
«   2025/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day
Total
관리 메뉴

... 어쩌다 여기까지?

주택로망 본문

카테고리 없음

주택로망

딸공 2020. 7. 14. 21:37

주말 저녁에 남편과 예능을 보며 낄낄대길 좋아하는 내가 요즘 푹 빠진 프로그램은, 전 국민의 주택 로망에 불을 지폈다는 <구해줘 홈즈>다. TV 속 집들이 동화 같은 거야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집들이 매우 실현 가능한 가격으로 소개된다는 데 있다. 아파트 값이랑 별 차이가 없거나 더 저렴한 집들이 어쩜 그렇게 넓은 마당에 다락에 테라스까지 품고 있는 건지. 그야말로 갬성 넘치는 집들을 바라보며 주택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히 프로그램이 심어준 판타지 탓인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탓인지 잘 모르겠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큰 나무 대문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태어나긴 포항에서 태어났다는데 백일 전에 대구로 이사 왔다니 당연히 포항의 기억이 전혀 없고, 처음 대구에 와서 자리 잡았다던 은하아파트 이야기도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어서, 내 기억 속 어릴 적 집은 큰 나무 대문이 있던 효목동의 집뿐이다.
연갈색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사과나무 너머 일곱 개의 계단을 오르면 현관문이 있는, 마치 TV에 나올법한 그런 집. 엄마 힐을 신고 찍은 어릴 적 사진도, 다방구나 고무줄놀이 같은 땀 냄새 가득한 기억 속의 장면도 이 나무 대문 집을 담고있다.
엄마는 집 마당을 꼭 ‘정원’이라고 불렀는데, 방학 숙제로 질경이나 민들레 같은 풀을 뜯어 식물채집표본 같은 걸 만들어 갈 때도 채집장소에 꼭 ‘정원’이라고 적었던 걸 보면, 나도 그 단어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마당 있는 집보단 정원이 있는 집이 더 부잣집 같잖아. 대체 둘이 뭔 차이냐고 굳이 따진다면, 왠지 마당엔 상추가 자라고 정원엔 장미가 자랄 것 같은 차이랄까. 마당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사과나무에서 자라는 열매는 사실 먹지 못하는 꽃사과였는데, 엄마는 매년 가을 꽃사과주를 담그며 사과나무의 존재 가치를 끌어 올리곤 했다. 술을 담그기 위해 사과를 따는 게 아니라, 사과의 가치로운 소모를 위해 술을 담그는 느낌이랄까.
정원을 기준으로 일곱 계단 위에 집이 지어진 탓에 아래로 세 계단만 내려가면 지하실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한여름에도 새카맣고 서늘하고 눅눅한 공기가 짐승처럼 뭉쳐있던 이곳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하실이라는 음침한 이름 대신 ‘차고’라고 소리 내어 부르면 우리 집이 좀더 부잣집처럼 보였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러 올 때면 또박또박하게 소리 내어 ‘차고’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이곳을 소개하기도 했다. 뭐, 아빠가 처음으로 버스가 아닌 차를 중고로 사던 날부터 지하실에 셔터를 열고 차를 집어 넣었으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담장을 면하고 있어 엄마 몰래 항상 창문으로 놀러 다니던 점빵집 딸래미 민주, 은근 새침해서 매번 나랑 징하게 싸우던 담뱃가게 선희, 누구네 딸이 있잖아~로 시작하는 잔소리의 단골 주인공이던 연탄 가게의 유정이, 그리고 밤마다 집 앞에 놓인 평상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엄마들의 수다와 별것도 아닌데 별미였던 강정, 땅콩과 같은 주전부리들까지. 나무 대문집에 얽힌 기억은 어째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싱그럽게 살아나는 걸까.
 
효목동의 나무 대문 집은 그대로 있을까? 어릴 때 우리가 공전이라 부르던 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길이 새로 나면서 골목길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지금 친정집에서 기껏 10분 남짓 거리인데 어째 한번을 안 가봤을까.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내 아이들은 이런 감성을 모르겠지. 뭐 니들은 니들 나름에 기억과 추억이 있겠지만, 라떼는 말이야...
<구해줘 홈즈>에서 내가 보고 싶은 건 갬성 넘치게 지어진 멋진 주택이 아니라, 내 기억 속 효목동 나무 대문 그 집과, 젊고 건강한 엄마 아빠의 모습, 그리고 그 시절의 마냥 따뜻하던 공기.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응 맞다.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