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여기까지?
고모 본문
비 소식에 이른 철수를 하고 캠핑장에서 돌아오던 아침, 전화가 왔다. 낮게 떨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한숨에 더럭 겁이 났다. 그리고 나는 슬픔보다 앞서 내일의 출근을 고민했다.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지병 없이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밤에 대해, 여든 넷이라는 고모의 연세에 대해, 자는 듯 간다는 표현 그대로 떠나신 고모를 두고 ‘호상’ 이라는 표현을 썼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좋을 호자를 붙이는 게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켠에는 ‘그래 고모 정도면.. ’이라는 생각이 있었던지, 고모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장성지구라는 이름으로 완연한 아파트촌이 들어선 신도시 포항시 장성동은 내가 어린 시절엔 그야말로 논밭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방학 때마다 가마솥에 우윳물(숭늉)을 맛보여주고, 갓 뽑은 가래떡의 따끈함을 알게 해 준 것도 고모였다. 촌수를 따지면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뻘 될 듯한 또래들이 함께 어울려 놀던 기억도, 나보고 영특하다 똑똑하다 칭찬을 늘어놓던 기억도, 모두 고모집에서 보낸 시골 겨울의 풍경 속에 들어있다. (비록 고모는 그 칭찬의 맺음말에 계집애가 쓸데없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전형적인 경상도 할머니였지만.) 자식들이 다 출가한 마루 딸린 세 칸짜리 초가집의 가운데 방에는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커다란 냉장고가 있었다. 냉동실에서 갓 꺼낸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이 사이에 끼던 초콜렛의 달콤함도, 종이 팩이 아닌 비닐 팩에 든 삼육두유에 빨대를 꽂아 쪽쪽댈 때의 고소함도, 모두 온돌의 온기가 돌지 않던 고모네 집 가운뎃 방에서의 기억이었다.
도시개발계획이 발표되고 고모네가 북부해수욕장이 내다보이던 땅에 4층짜리 빌딩을 지어 이사한 것은 4학년 즈음의 여름방학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놀 거리가 넘치던 시골과는 다르게 고모집이 갑자기 심심해진 것도, 그래서 1층 상가의 입주를 앞두고 한창 바쁘던 인테리어 공사에 감독관마냥 죽치고 앉아 구경을 했던 것도, 공사장의 수평계와 벽돌을 장난감처럼 바라보다가 하루해가 후딱 저물던 것도, 고모네 작은 방 벽장에 방보다 더 큰 공간이 있는 걸 발견하고 마치 옷장 속 나니아를 발견한 것처럼 좋아했던 것도 모두 뜨거웠던 그 해 여름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따뜻했던 추억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묻은 그 곳에서 하나 둘 형광등이 꺼지고 온기가 가시던 시간은. 내가 자란 탓인지 고모가 늙은 탓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 모를 시간 속에서 나는 그렇게 고모를 점점 잊어갔다.
여섯 남매의 막내인 아버지는 이제 홀로 남겨졌다. 사람은 태어날 때 열 달을 준비하지만 떠날 때는 한 순간에 가는 거라고, 그래서 삶 전체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동기들의 죽음 앞에 초연하게 남겨짐을 준비하는 것은 막내 된 자의 몫인가? 호상이라는 말 앞에서 쉽게 그렇군요, 할 수 없었던 것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라리 잘 됐다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 뒤 어두운 떨림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떠난 사람은 남기고 간 사물이 아닌 남은 자들의 기억에서 추억되는 것. 장판이 눌어붙어 앉아있기조차 힘들던 그 겨울 고모네 구들장의 추억도, 그만큼이나 뜨거웠던 고모의 온기도 이제는 온전히 그걸 기억하는 나의 몫이다. 남은 시간을 더 잘 살아내는 것도, 그만큼 후회 없이 또 하루의 죽음을 준비하는 생을 살아내는 것도. 이제는 세대교체인거지, 라는 말로 쓸쓸함을 애써 감추시던 아버지를 잊지 않는 것도. 호상이란 말은 남은 자들을 위한 위로와 예의의 표현일 뿐, 상투적인 죽음은 없으므로.
고모 잘 가요,
따뜻하고 고소했던 기억들을 남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거기에 울 아빠만 빼고 다섯 남매가 모두 모였을 테니 울 아빠 여기서 내내 건강하시기를 그렇게 빌어줘요.
안녕.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지병 없이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밤에 대해, 여든 넷이라는 고모의 연세에 대해, 자는 듯 간다는 표현 그대로 떠나신 고모를 두고 ‘호상’ 이라는 표현을 썼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좋을 호자를 붙이는 게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켠에는 ‘그래 고모 정도면.. ’이라는 생각이 있었던지, 고모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장성지구라는 이름으로 완연한 아파트촌이 들어선 신도시 포항시 장성동은 내가 어린 시절엔 그야말로 논밭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방학 때마다 가마솥에 우윳물(숭늉)을 맛보여주고, 갓 뽑은 가래떡의 따끈함을 알게 해 준 것도 고모였다. 촌수를 따지면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뻘 될 듯한 또래들이 함께 어울려 놀던 기억도, 나보고 영특하다 똑똑하다 칭찬을 늘어놓던 기억도, 모두 고모집에서 보낸 시골 겨울의 풍경 속에 들어있다. (비록 고모는 그 칭찬의 맺음말에 계집애가 쓸데없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전형적인 경상도 할머니였지만.) 자식들이 다 출가한 마루 딸린 세 칸짜리 초가집의 가운데 방에는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커다란 냉장고가 있었다. 냉동실에서 갓 꺼낸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이 사이에 끼던 초콜렛의 달콤함도, 종이 팩이 아닌 비닐 팩에 든 삼육두유에 빨대를 꽂아 쪽쪽댈 때의 고소함도, 모두 온돌의 온기가 돌지 않던 고모네 집 가운뎃 방에서의 기억이었다.
도시개발계획이 발표되고 고모네가 북부해수욕장이 내다보이던 땅에 4층짜리 빌딩을 지어 이사한 것은 4학년 즈음의 여름방학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놀 거리가 넘치던 시골과는 다르게 고모집이 갑자기 심심해진 것도, 그래서 1층 상가의 입주를 앞두고 한창 바쁘던 인테리어 공사에 감독관마냥 죽치고 앉아 구경을 했던 것도, 공사장의 수평계와 벽돌을 장난감처럼 바라보다가 하루해가 후딱 저물던 것도, 고모네 작은 방 벽장에 방보다 더 큰 공간이 있는 걸 발견하고 마치 옷장 속 나니아를 발견한 것처럼 좋아했던 것도 모두 뜨거웠던 그 해 여름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따뜻했던 추억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묻은 그 곳에서 하나 둘 형광등이 꺼지고 온기가 가시던 시간은. 내가 자란 탓인지 고모가 늙은 탓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 모를 시간 속에서 나는 그렇게 고모를 점점 잊어갔다.
여섯 남매의 막내인 아버지는 이제 홀로 남겨졌다. 사람은 태어날 때 열 달을 준비하지만 떠날 때는 한 순간에 가는 거라고, 그래서 삶 전체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동기들의 죽음 앞에 초연하게 남겨짐을 준비하는 것은 막내 된 자의 몫인가? 호상이라는 말 앞에서 쉽게 그렇군요, 할 수 없었던 것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라리 잘 됐다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 뒤 어두운 떨림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떠난 사람은 남기고 간 사물이 아닌 남은 자들의 기억에서 추억되는 것. 장판이 눌어붙어 앉아있기조차 힘들던 그 겨울 고모네 구들장의 추억도, 그만큼이나 뜨거웠던 고모의 온기도 이제는 온전히 그걸 기억하는 나의 몫이다. 남은 시간을 더 잘 살아내는 것도, 그만큼 후회 없이 또 하루의 죽음을 준비하는 생을 살아내는 것도. 이제는 세대교체인거지, 라는 말로 쓸쓸함을 애써 감추시던 아버지를 잊지 않는 것도. 호상이란 말은 남은 자들을 위한 위로와 예의의 표현일 뿐, 상투적인 죽음은 없으므로.
고모 잘 가요,
따뜻하고 고소했던 기억들을 남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거기에 울 아빠만 빼고 다섯 남매가 모두 모였을 테니 울 아빠 여기서 내내 건강하시기를 그렇게 빌어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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