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공

15년 지난 은행은 못 먹겠지.

딸공 2019. 2. 17. 16:24
이사준비 중. 10년 만의 이사라 묵은 짐이 많다.

냉장고를 뒤집다가 냉동실 젤 아랫칸, 15년이 지난 은행과 말린 대추를 집어들고 멈칫한다. 2006년, 대구 집을 정리하며 냉동실에서 꺼내 온 은행과 대추였다. 진작에 차라도 끓여먹고 구워 먹었음 좋았을까. 냄새나는 은행을 굳이 주워다 씻어 쟁이는 엄마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혹은 냉장고를 한번씩 뒤집을 때마다 버릴까 생각만 하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늘 제일 아랫 서랍에 다시 넣고 말았던 은행과 대추. 이제 먹지 못하는 건 나도 아는데 냉동실 한켠에 엄마의 흔적이 남은 듯, 생각하면 그냥 마음이 가끔 좋았다. 이제 그만 버려야 할텐데 이번에도 지퍼백만 옮겨 담아 다시 젤 아랫칸에 모셔두고 마는 나.

꽤 잘나가던 알루미늄 회사의 통근버스를 운전하셨던 아버지는 IMF이전까지 명절이나 창립기념일마다 냄비세트를 받아오셨다. 덕분에 어린시절 나는 스승의 날마다 프라이팬 세트를 들고 가서 이쁨받는 학생이었다. 그 시절 스승의 날은 당연히 선물 주는 날이었는데 흔한 속옷보다 프라이팬 너무 좋다며 대놓고 칭찬하던 선생님이 불편하면서도 으쓱했던 철없는 기억...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느 때부턴가 선물로 들어온 냄비들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엄마는 따로 빼서 창고에 넣기 시작하셨다. '너 시집갈때 가져가라' 덧붙이며. 시집을 언제갈 줄 알고 뭔 냄비냐 툴툴대던 나는 2006년의 집정리때 냄비부터 소중히 꺼내왔다.
 

철없던 신혼시절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되는 걸 몰라 홀랑 코팅이 벗겨진 뒤로 쓰지도 못하면서 십여 년을 끼고 다닌 냄비 두 개. 이제 그만 버려야겠다.



이사를 일주일 앞두고 나는 출근을 하는데 곰돌은 봄방학에 들어갔다. 방학 내 혼자 노는 것도 지쳤는지, 할머니 집에 갈래? 하는 말에 냉큼 콜을 외친다. 혼자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인데, 어차피 한드미 가면 매번 버스타고 혼자 다녀야 하니까..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큰소릴 치면서도 살짝 긴장했는지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혼자 탄 기차가 플랫폼을 떠나는데 마음이 어찌나 이상하던지. 그렇게 또 성큼 떠나가는구나, 훅 자란 느낌이다. (이래놓고 돌아오면 재니랑 베이로 불꽃튀게 싸우겠지만.. ㅡㅡㅋ)

15년이 지난 은행은 못 먹겠지만 다시 접어 넣어두기로 한다. 마치 부적처럼... 버리는 건 순간이면 되니까 서두를 필요 없다. 훅 자라 품을 떠나는 아이처럼 시간은 늘 빠르고 나의 걸음은 느리다.

어느새 롱패딩이 어색해지는 날씨. 아이와 나의 새해가 함께 3월에 시작한다는 건 교직의 축복이다. 곧 3월. 이제 새학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