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패씽, 교사는 적폐인가?
교육공무원법 제 41조에 따른 자가 연수, 이 법을 악용해 방학마다 교사들이 해외여행을 다닌다며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왔다. 처음에는 저 청원을 누가 올렸을까? 학교 사정을 너무 잘 아는 누군가 올렸을 것이다. 정도로 시작되더니 결국 그 시작은 교육공무직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버렸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일명 실무사들, 호칭을 선생님이라 불러라, 교사와 같은 처우를 달라 등등 매번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번만큼 낯설게 느껴진 적도 없었던 듯. 온라인에서 시작된 논쟁이 오프라인의 시선마저 어색하게 만든다. (이들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나는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청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단 이게 교육공무직만의 배아픈 목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때다 싶게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도, 옆집 교사가 지금 막 여행을 떠났다며 댓글 다는 동네 아줌마도, 결국 교사에 대한 은밀하고 불편한 시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촛불 혁명의 힘으로 정권에 대한 신뢰도가 최고조를 찍을 때에도 교육만큼은 철저히 내 자식 위주로 투표하게 되는 대한민국에서 교사에 대한(사실은 교육에 대한) 믿음이 바닥을 찍었다는 것. 그게 진짜 쟁점이 아닐까?
교사에 대한 이 불편한 시선은 어디서부터 시작이었을까? 꼬우면 너도 교사해라 따위의 유치한 말싸움은 접어두고, 진보정권일수록 엄청난 기득권에 적폐취급 받는 교사패씽의 서러운 현실도 다 밀어 놓고, 그냥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 욕을 먹는가?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올라오는 체벌, 촌지 관련 기사부터 교사의 갑질에 힘들다는 학교 비정규직의 목소리들까지, 기사와 댓글들을 읽다보면 결국 불편한 시선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교사는. 공무원은. 철밥통이라서.
하지만 여기서도 한 목소리의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교사의 고용 안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육의 안정이 어렵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미 개인적 동의를 넘어서 사회적 합의를 해왔는데, 철밥통에 대한 불편한 심리와 교육의 안정에 대한 인지적 동의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이다. 즉,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짜증이 나는 것. 그 짜증의 뿌리는 결국 개인의 학창시절에 대한 불편한 기억으로 수렴한다. 급하게 많은 교사를 양성해야 했던 산업화 시절, 교사같지 않았던 교사들과 그 와중에 참교육을 실천했던 소수의 교사들. 미성년자 시절에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특수성을 지닌 학교에서, 너무 넓은 스펙트럼의 교사 집단이 얼마나 많은 '나쁜 기억'을 교육했는지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청난 국가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 미적분을 배운다고 당장 더 똑똑해지지 않더라도 생각하고 도전하도록 가르쳐야 하며, 상처받았을 때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고 부당한 일에는 맞서 싸울 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 줘야 한다. 나와 이웃을 향한 넉넉한 감정의 달란트를 지닌 시민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 모두 교육의 몫이다. 그런데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지금 우리 교사들이 할 수 있을까?
촌지와 체벌이 흔했다는 쌍팔년도식 접근법이 통하지 않는 세대에 교직에 입문한 사람으로서 억울하고 짜증이 나지만 나는 과거 '나쁜 기억'의 트라우마로 학교에 보내는 불편한 시선, 거기에 또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평생의 불편한 감정을 지배한다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평생을 따뜻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칠 수도 있다는 증거. 그 또한 교육의 힘이라는 증거. 그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교사들이 꼭 새겨야 할 교훈이다.
교육을 한다는 것은 사고체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독재자 박씨의 반공교육의 힘으로 그 딸까지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꼴을 우리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육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것에 사회 전체가 합의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교육의 성과는 스무살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교사들의 노력은 다음 세대가 오기 전에 빛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 전에 교사들이 너무 날선 시선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기다려주고 함께 믿고 지켜보는 일도 사회가 함께 해나가야 한다. 과거의 기억으로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성토하는 것은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세뇌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미래 세대에 교육이 무조건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따뜻한 정의를 가르치는 것, 그게 오늘을 사는 조금은 억울한 우리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방학 중 뜬금없는 41조 연수 논란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학교를 떠올릴 땐 마냥 사랑받았던 따뜻함만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