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고부관계, 나이에 대한 단상.
생각해보면 크게 힘들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명절 연휴는 언제나 3일.
우리의 일정은 언제나처럼, 연휴 시작 전날 밤에 내려가
연휴 첫 날 하루 온전히 보내고,
명절 당일 아침 차례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일어나 나오곤 했으니.
첫 명절 한 번,
작은어머님들도 안가는데 니가 어딜 가냐며 연휴 시작 한 달 전부터 폭풍 잔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울며 불며 전화통화 몇 번에, 그리고 서끄씨를 닥달한 덕분(!)에
명절 차례 끝나자마자 차막힌단 핑계대가며 일찍 나왔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명절날 일찍 나오는 문제로 실랑이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잠깐 욕먹더라도, 그냥 밀어붙이는 게 정답이구나. 하고.
그런데 왜일까.
왜 나는 광주만 가면 마음이 불편하고, 그냥 싫고 자꾸만 더 기분이 나빠지며,
심지어 멀쩡하던 몸도 시름시름 아픈 걸까.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결혼 후 첫 명절. 그리고 나에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돌아온 명절.
그 해 추석, 나는 울 엄마 첫 차례상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시집에 가서 있어야 하는 게 싫었고,
빈말이라도 너 친정 다녀와라. 할거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없는 기대를 했었다.
그랬던 첫 명절에서,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들을 위해 전 굽고 억지 웃음으로 시외할머니댁 인사까지 드리고
그들이 말하는 '며느리 도리'를 다 하고 나서도
친정에 가겠다 나서는 뒤통수에 꽂히던 차가운 시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명절을 쇠러 가기 위해, 정성을 들여 약식을 준비할 마음 따윈,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건.
곰돌이 태어난 그 해 설날,
곰돌이 갓 한 달 쯤 되었던가..
너무 어린 아기를 데리고 먼 길 가기 힘들다며 한 해 쉬었더랬는데.
당신 아들이 명절 음식 구경도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 어른들은
명절이 끝나자마자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오셨었다.
몇 년 후에 그 사건을 떠올리며, 어머님은 '그 때 왜 제대로 반갑게 인사하지 않았니' 라고 하셨지만,
첫 아이, 산후조리 중에 그야말로 맨발 마중을 나갔던 나는,
그냥 추워서 홀랑 들어와 맞이했던 것 뿐이었는데.
살얼음 동동뜬 얼음 식혜를 꺼내 놓으시며,
'너는 젖삭으니까 먹지마라.' 하시던 말씀만 머리에 남아서,
아직도 시집에서 식혜만 보면 그 때 그 일이 떠오르는 걸. 어머님은 아실까.
당신이 만든 식혜엔 죽을때까지 입대지 않겠다 마음 먹은 걸.
아마 모르시겠지.
나도 사실 안다.
나와 어머님의 관계에서 지금 누가 더 상처받고 있는지.
아들 둘 키우는 여자. 이기 이전에, 아들 둘 있는 집에 시집 온 여자. 인 나는,
마냥 나만 상처받은 듯 말할 자격 없다는 것도.
하지만..
내가 밥 값 못하고 공부한답시고 당신 아들이 벌어온 돈으로 먹고 살던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생각없이 나에게 내질렀던 그 많은 말들. 그에 따른 상처들..
세월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다는 걸.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만 하는 걸.
자다가도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져서 미친년처럼 울고 나도 속이 풀리지 않아
결국 상담까지 받고 지워야 했던 그 시간들.
이제는 나도 어째야 할 지 정말 모르겠다.
친해지려고 억지로 노력하거나 웃지 않기.
이게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 일 뿐.
그리고 한 가지 더..
엄마가 보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엄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은, 나이를 먹을 수록.
내가 기억하는 그 때의 엄마와 내 나이가 비슷해져 갈 수록.
더욱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예의바르기. 보단 그냥 상처받지 않기.
하고 싶은 말은 그냥 하기.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 명절에도, 아마 상처받기보단 상처를 주고 왔을테지.
어렵게 지내자.
친해지려 하지 말고.
서로 어려워하며.
서로.
나 혼자 말고.
서로.
누구 말처럼.
몇 년 지나면 없어질 문화일까.
그런거 따지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적당히 어려워하며, 그냥 잘 지내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일까.
나. 아무래도.
상담이 좀 더 필요한 듯.
이번 명절,
힘들었다.